환경 심리학에는 ‘심리 건축psychoarchitecture’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한 흐름이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건축된 공간은 인간 경험의 중립적인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적극적인 참여자다. 천장의 비율, 벽의 질감,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각도는 단순한 미적 조건이 아니라 심리적 조건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주의를 형성하고 감정을 조정하며 안전하거나 노출되었거나 보살핌을 받거나 버려졌다고 느끼는 데 영향을 준다. 이레네 바르톨로메의 장편 데뷔작 〈또 다른 여름의 꿈〉은 이러한 전제를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삶에서 체화한 감각적 진실로 온전히 받아들인 듯 펼쳐진다.

 

영화는 2020년 8월 항구 폭발 참사가 발생한 이후 어느 시점에 베이루트로 돌아온 알리시아를 따라간다. 바르톨로메는 사건 자체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를 거부하며 르포르타주나 귀환 서사의 익숙한 관습을 비켜 간다. 대신 그가 주목하는 것은 포착하기 어려운 무엇, 내면과 외부 세계가 모두 무너진 뒤 남은 감정의 잔여다. 부엌과 침실, 카페 같은 공간들은 그 안에서 한때 살아 움직였던 삶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영화는 삶의 가시적인 구조가 무너졌을 때 무엇이 남는지, 남은 것들이 어떤 식으로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지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묻는다.

 

그 결과 놀랍도록 섬세하고 절제된 작품이 탄생한다. 〈또 다른 여름의 꿈〉은 사건이 아니라 경험의 질감 자체를 표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현상학에 가까운 접근 방식을 취한다. 슬픔과 그리움, 방향 감각의 상실은 서사로 설명되기보다 사물의 표면과 분위기, 공간의 배치 위에 새겨진다. 카메라는 가만히 머물며 정돈되지 않은 침대가 놓인 방 하나를 부재에 관한 단순하면서도 압도적인 형상으로 바꿔 놓는다. 이러한 제스처는 바르톨로메를 샹탈 아커만으로 대표되는 엄격하고 사색적인 작품의 계보와 연결 짓게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가 프레임에 도시를 담아내는 방식에는 특유의 다정함이 깃들어 있는데, 연약한 무언가를 대하듯 하며 마치 조금의 압력만으로도 피사체가 부서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영화는 조급함을 지양하며 인내와 고요, 그리고 명상적 명료함 속에서 움직인다.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는 음성 메시지는 설명을 위한 장치가 아닌 연결의 조각으로 기능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보는 장면을 해설하기보다 바깥을 향해 뻗어 나가며 더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어떤 것을 찾아 나선다. 말들은 빛처럼 고르지 않게 떨어져 어느 구석은 밝히고 다른 구석은 어둠 속에 남겨 둔다. 바르톨로메는 언어와 장소의 관계, 어떤 문장이 특정한 방에 속해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달라진 환경 속에서 익숙한 단어가 되울릴 때 생겨나는 현기증 나는 감각을 예리하고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이 영화에서 언어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이 울려 퍼지는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조건적인 무엇이다.

 

바르톨로메가 이해하는 바, 그리고 심리 건축이 가장 정교한 차원에서 암시하는 바는 건축된 환경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적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지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미묘하면서도 지속적인 방식으로 그 공간에 의해 형성된다. 공간은 몸과 기억,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상적 리듬에 스며든다. 그러한 공간이 변형되거나 파괴될 때, 물질적 잔해와 마찬가지로 자아의 일부 또한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간다. 파괴된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히 피해를 직접 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기억과 더는 일치하지 않는, 균열된 자아의 지형을 마주하는 것이다.

 

2020년 폭발 참사 이후의 베이루트는 이를 극명히 보여 주는 사례다. 역사상 가장 큰 비핵 폭발 중 하나였던 그 사고는 많은 건물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도시와 거주민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일상의 구조가 지속되리라는 암묵적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다. 〈또 다른 여름의 꿈〉이 머무는 곳은 바로 이러한 균열의 지점이다. 붕괴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 길게 이어져 온 불확실한 시간성이다. 그 안에는 여전히 익숙하지만 더는 온전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거리를 걷는 경험, 자신의 삶을 구성하던 도시의 구조가 갑자기 낯선 무언가로 변해 버린 듯한 감각이 담겨 있다.

 

포르투갈어에는 ‘saudade’라는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것, 돌아오지 않을 것, 혹은 애초에 소유한 적 없는 것을 향한 그리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르톨로메의 영화는 이와 가까운 정서를 깊이 품고 있다. 작품을 관통하는 멜랑콜리는 직접 표현되기보다 구조적으로 내재한다. 그것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 편안함의 경계를 조금 넘어서까지 숏을 유지하기로 한 선택 속에, 침묵을 서둘러 채우기보다 그대로 두려는 의지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 멜랑콜리는 조용하고도 끈질긴 돌봄의 제스처를 수반한다. 거의 감지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서서히 의미를 쌓아 간다. 누군가에게 화분에 물을 달라고 부탁하는 음성 메시지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섬세한 구조 안에서 조용히 윤리적 무게를 획득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형태의 돌봄조차 해체에 맞서는 저항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식물, 관계, 일상의 연약한 루틴을 돌보며 유지하는 일은 균열 속에서도 지속성을 단단히 지켜 나가는 방식이 된다.

 

영화는 결국 우리가 다양한 형태의 폐허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는 논쟁적 선언이라기보다 이미지로부터 자연스럽게 관찰되는 무엇에 가깝다. 베이루트의 환경은 상실과 그 뒤에 올 시간 사이에 머무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거나 어쩌면 직접 만들어 내기도 한다. 바르톨로메가 포착한 파괴는 스펙터클하지 않으며 극화되기를 거부한다. 대신 그것은 가장 일상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모두가 피해 상황에 점차 익숙해지고, 잔해가 한 장소의 평범한 질감으로 자리 잡아 가듯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질감은 더는 예외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그저 삶이 계속되는 바탕이 된다.

 

이러한 접근에는 조용한 급진성이 있다. 스펙터클을 거부함으로써 바르톨로메는 재난이 일상에 밀착된 것이라는 감각을 되돌려 놓고, 그것을 압도적인 사건이 아니라 미세하고 지속적인 변위들의 연속으로 경험하게 한다. 프레임 속 도시는 안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취약한 존재로서 살아 숨 쉰다. 영화는 마치 반쯤만 기억에 남은 꿈이 명료하게 이야기되지 않으려 하듯 고정된 해석을 거부한다. 그 의미는 붙잡으려 할수록 흩어지지만, 영화가 남기는 정서적 울림은 오래도록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