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 인도를 여행하던 중 만난 암소에게 두어 차례 받친 경험이 있다. 그 소는 내 숙소에서 거리로 나가는 길목에 상주했고, 지나가는 이들을 심심찮게 들이받았다. 소의 뿔은 짧고 뭉툭해(뿔 모양이 본래 그랬는지, 소의 공격성을 우려한 이들이 뿔을 잘라 냈는지는 모른다) 별 위험이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거대한 동물과의 충돌은 매우 무서운 일이었다.

내가 매 아침 그 소를 마주쳐야 하는 두려움을 토로하자 현지인들은 웃으며 조언했다. 소가 당신을 의식하기 전에 서둘러 지나가고, 당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말라고. 소가 인간을 위협하는 행위를 문제 삼거나 소를 길목에서 몰아내려는 태도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 소가 길의 주인인 양 이야기했고, 나는 관광객다운 순진함으로 인도에서 소가 가진 힘과 지위에 대한 낭만을 부풀리고 곱씹었다.

 

앙쿠르 후다 감독의 〈송아지 인형〉에서 소들이 가진 힘은 그처럼 낭만적이지도, ‘주인’ 같은 단어에 걸맞게 강력하지도 않다. 외려 영화가 시작부터 보여 주는 것은 인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의 비명이다.

소는 네댓 시간 이어지는 출산에 괴로워하며 비명을 지르다가 죽은 송아지를 낳는다. 이 광경을 내내 지켜본 청년은 짐을 싸서 암소를 떠난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고, 이 마을을 벗어나 도심의 산업 단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고 알린다.

그가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마을을 떠난 순간 패닝한 카메라는 목소리로만 등장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담는다. 은퇴한 노교수이고 농장의 주인인 노인은 화면의 중심에 서서 한참을 허둥거린다. 곧 그는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스쿠터를 타고 소를 돌보러 가지만 소는 이미 젖을 짤 수 없는 ‘쓸모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얼마 후 찾아온 의사는 노인에게 비싼 주사를 놓는 대신 사산된 송아지로 인형을 만들라고 조언한다. 비록 가짜여도 송아지 인형이 있다면, 암소가 한결 쉽게 회복하여 전처럼 젖을 짤 수 있으리란 것이다. 노인은 망설이지만, 소를 원상태로 돌리려면 주사 아니면 송아지 인형밖에 방법이 없다(혹은 아예 소를 팔아 버리라)는 말에 인형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죽은 송아지를 서툰 솜씨로 박제해 만든 인형의 생김새는 분명 기이하나 그 모양이 자아내는 정서는 섬뜩함보다 서글픔에 더 가깝다. 이 서글픔은 청년들이 떠나고 남은 시골 마을과 거기 사는 노인들에게도 쉽게 대입할 수 있다. 마을에 남겨진 노인들은 울창하기만 하고 ‘쓸모없는’ 나무의 가지를 팔아 푼돈을 벌고자 도끼를 휘두르거나, 좀이 슨 옛 사진을 들여다보며, 암소를 팔고 도시로 나가 살아야 한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노인은 소를 팔고 싶지도 마을을 떠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엉성한 얼굴을 지닌 인형이 어떻게든 소를 낫게 하리라 믿으며, 죽은 송아지의 입마개를 만든다.

노인의 희망과 달리 화면을 채운 송아지 인형은 노인의 아내 말마따나 “죄”의 흔적 같은 모습으로 놓여 있을 뿐이다. 무력하게 늘어진 인형의 이미지는 도심에서 몰려온 스모그에 뒤덮인 마을과 거기 머무는 노인들의 얼굴로 이어진다. 그들은 제 영역을 지나가는 누군가를 들이받긴커녕 자신이 서 있는 길목이 차차 사라지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사방이 조여 오는 공포는 인적 없는 마을 잔치에서 울리는 노랫소리와 “대체 여기서 뭘 찍어야 하냐”라고 불평하는 영화 속 다큐멘터리 팀의 대화, 그리고 소의 비명으로 드러난다. 소리로 에워싸인 노인들의 입은 점점 굳게 다물려, 종내 침묵만 이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힘과 집단은 명확히 구분된다. 도시와 시골, 청년과 노인, 농업과 산업 등. 얼핏 진부하게 느껴지는 이분법에 낯선 긴장을 부여하는 건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그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는 동물들의 얼굴이다. 미래를 맞이하지 못하고 하나의 형태로 박제된 송아지 인형의 얼굴, 밤낮에서 각자의 소리로 울거나 낑낑대는 개와 소의 얼굴은 영화의 내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를 담고 있다. 오래전 좁은 길목에서 나를 노려보던 소의 얼굴을 내가 일절 읽을 수 없었듯, 영화의 ‘쓸모’와는 상관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동물들의 얼굴은 읽히지 않는 무엇으로 담긴다. 알 수 없으므로 두렵고, 알 수 없기에 더 많은 감정을 상상하게 한다. 어쩌면 그 두려움과 상상의 감각이야말로 송아지 인형을 끌어안은 노인의 고독에 가장 밀접히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