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에서 일하는 중년 에드 색스버거(윌렘 더포)에게 불현듯 예술가의 후광이 비친 건,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청년이 그를 ‘시인’으로 호들갑스럽게 호명하면서다. 청년은 에드 색스버거가 1979년에 발표한 시집의 현재성을 칭송하며 그를 젊은 예술가 모임에 초대한다. 에드 자신에게조차 잊혀 먼지 쌓인 상자 속에 보관된 과거의 기억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아주 오래전 한 권의 시집을 낸 무명의 시인, 지금은 주변의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평범한 노동자의 일상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다. 그의 시는 오늘날 젊은 예술가 공동체 안에서 뒤늦게 빛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새로운 시를 쓸 수 있을까.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영화 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으로 활발히 활동해 왔으며, 다큐멘터리 〈히치콕 트뤼포〉와 장편 극영화 데뷔작인 〈다이앤〉 등을 연출한 켄트 존스의 두 번째 장편이다. 〈다이앤〉의 주인공이 과거에 벌인 일로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현재를 견뎌 내는 노년의 여성이라면, 〈나의 사적인 예술가〉의 에드 색스버거는 퇴색된 과거의 열망을 젊은 세대와의 교류 속에서 다시 꿈꿔 보는 남자다. 전자에게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그로 인해 짊어져야 할 책임과 고독이 남겨진다면, 후자에게는 과거의 꿈이 아직 완전히 휘발되지 않은 채 미래의 가능성으로 새삼 주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다이앤〉과 달리 〈나의 사적인 예술가〉 전반에는 오묘한 향수의 정조가 깃드는데, 그것의 정체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영화는 에드 색스버거의 과거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려주지 않는다. 현재의 그가 그 과거를 그리워하는지도 실은 잘 알기 어렵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에 흐르는 향수의 정조는 엄밀히 말해 인물의 것이기보다는 이 영화의 것이다. 요컨대 영화 속 젊은 예술가들의 차림새, 말투, 제스처, 분위기, 관계 등에 밴 감상, 자부심, 아날로그적인 공기는 아무래도 동시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바로 옆 테이블에서 소셜 미디어에 몰두하는 또래 집단을 대놓고 멸시한다. 그들이 추종하고 모방하는 문화는 과거를 응시한다. 이들의 면모에는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문화적 풍요를 누린 감독의 경험과 기억, 혹은 현재의 그가 느끼는 일말의 상실감이 투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과거의 잔상을 되살리는 한편 그러한 예술적 자의식의 허영과 모순도 지켜본다. 에드 색스버거는 자신의 시를 망각에서 구해 준 젊은 예술가들이 실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계급적 토대 위에서 ‘예술’을 논한다는 사실을 대면한다. 그들은 말하자면 에드 색스버거가 시를 포기한 채 긴 시간 버텨 온 ‘현실’을 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젊은 여성 뮤즈에 대한 일견 상투적인, 시대를 불문한 남성 예술가들의 환상을 거부할 수 없는 낭만으로 그리면서도 그들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거울로 삼는다. 

 

에드 색스버거는 결국 자신의 시집을 농담거리로 삼던 투박한 노동자 동료들의 거처로 돌아간다. 삶으로 귀환하는 그 행로에는 설레는 무엇도 없으나, 정직한 자기 인식이 있다. 무엇이 그를 꿈에서 깨게 한 것일까. 계급 차이, 세대 차이, 혹은 예술관의 차이는 부차적인 문제인지 모른다. 예술이라는 모래성, 시적 열망이라는 신기루. 〈나의 사적인 예술가〉가 무명의 시인 노동자의 주름 팬 얼굴로 ‘다시 살아 본’ 시간은 그처럼 아름답고도 허망한 한순간의 희열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