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이의 신음일까. 참을 수 없는 슬픔의 탄식일까. 이미지를 보여 주기에 앞서, 샤클린 얀센의 〈6주 후〉는 누군가의 울음 섞인 숨소리, 그 파열음으로 영화의 문을 열어젖힌다. 소리의 정체는 엄마 마르타의 임종을 지켜보던 딸 로레의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자의 리액션이자 달리 방도가 없는 이의 유일한 액션에 가깝다. 영화는 엄마라는 커다란 존재의 상실 앞에 서 있는 로레를 통해 죽음 이후의 시간을 담담하게 그려 나간다. 과연, 어떻게 해야만 사랑하는 이와 잘, 충분히, 정확하게 작별할 수 있을까.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질문 앞에서 영화는 소란 떨지 않고 시종 차분하게, 하지만, 신중하고 진중하게 시간을 보내고, 시간을 기다린다.

 

영화는 코로나 팬데믹 한가운데의 독일 라인란트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주요한 플롯은 엄마의 죽음 이후, 로레가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겪게 되는 내면의 동요와 외적인 변화에 맞춰져 있다. 감염의 시대라는 외부적 환경은 어쩔 수 없이 이 영화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 사이에 심리적 경계심이 생기기도 하고, 직접적인 대면을 꺼리는 이웃들을 목격하게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얼마 없는 로레의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마르타의 장례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고 그로 말미암아 격렬하게 맞붙는 데서 오는 감정의 역학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입관해 매장하는 문화가 지배적인 독일 사회에서 마르타는 살아생전 자신이 죽으면 화장 후 바다에 뿌려 달라고 청하였으니. 죽은 자의 의사를 어디까지 얼마나 존중할 수 있는가가 로레가 당면한 화두다.

 

혼자라는 사실 앞에서 로레는 점점 더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되레 꿋꿋하다. 엄마를 위한 결정이 무엇일까를 자문하며 엄마를 잘 보내드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분투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6주 후〉는 죽음과 애도라는 질문을 경유해 성숙과 성장의 과정을 보여주는 로레의 성장담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과격한 설정이나 감정의 과잉 없이도 영화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착실하게 헤어짐을 준비해 나간다.

 

〈6주 후〉는 라인강 하류 지역 출신인 감독 샤클린 얀센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실제로 코로나 시기에 엄마를 떠나보내야 했던 감독은 그때 겪은 구체적인 일화와 복잡한 마음의 상태를 일기처럼 써 내려갔고, 그것이 지금의 영화로 완성됐다. 특히나 영화의 원제인 ‘6주간의 미사’는 이 지역에서 사람이 죽은 뒤 약 6주 후에 열리는 가톨릭 예식을 뜻한다. 그와 동시에 작별을 준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에 대한 영화적 은유로 읽힐 만하다. 그 기간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마르타는 깊은 안식에 들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로레 역시도 평안한 고요에 이를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초반, 귓전을 파고들던 어둠 속 로레의 슬픔 어린 숨은 이제 안온한 숨결이 되어 어머니의 방안을 채운다.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든 듯한 평온한 얼굴이 우리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