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바이저Chronovisor
감독 잭 오언Jack AUEN, 케빈 워커Kevin WALKER | United States | 2026 | 99 min | Experimental | 국제경쟁International Competition
가톨릭 신부 펠레그리노 에르네티와 그의 발명품 크로노바이저에 대한 진실을 좇는 주인공 베아트리스 쿠르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언제부터? 돌이켜보면, 〈크로노바이저〉는 음모론적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주인공의 동기를 묘사하지 않는다. 학자인 베아트리스의 연구 과정인 것처럼 특별한 서사적 발단 없이 이야기는 시작되고, 관객인 나는 음모론적 세계에 진입했다는 자각 없이 영화를 쫓아가는 중이다.
베아트리스가 무아지경으로 탐색하는 자료들을 함께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언제까지? 베아트리스의 시선은 대부분 텍스트에 정박하고 있다. 〈크로노바이저〉의 텍스트는 이미지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영화는 ‘설마, 계속, 이렇게?’의 바로 그 방식으로, 관객이 화면에 가득 찬 텍스트를 줄곧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영화다.
과거를 촬영할 수 있는 기계를 소재로 삼았으면서도 이미지와 사운드 대신 활자를 중심에 두는 연출적 선택은 과감하면서도 흥미롭지만, 대단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영화가 진정 시각적 매체인지 질문하기 위해 텍스트를 앞세워 이미지의 지위를 흔들거나, 반대로 텍스트가 지닌 이미지적 성질을 탐구하려 했던 여러 선구적 작품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크로노바이저〉에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매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텍스트를 들이미는 반(反)자기반영적 태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문 위에 번역문을 겹쳐 떠오르듯 보여 주는 기법에서 약간의 시각적 리듬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크로노바이저〉의 텍스트는 전적으로 음모론적 이야기를 둘러싼 방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크로노바이저〉를 보며 드는 가장 큰 의문은 이런 것일 수밖에 없다. 활자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의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한 가지 문제가 끼어든다. 진짜인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고 픽션인지, 모든 게 그저 만들어진 것인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혼란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다. 상술한 것처럼 〈크로노바이저〉가 영화로 만들어져야 했을 이유가 마치 이토록 방대한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인 것처럼 영화는 줄곧 텍스트 자체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크로노바이저〉는 관습적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제작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될 만큼 펠레그리노 신부와 크로노바이저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잭 오언과 케빈 워커는 믿을 수 없는 실제 사건을 “은둔형 학자의 (······) 안락의자 탐정물”로 만든다. 이 은둔형 학자, 안락의자 탐정,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향한 맹목적인 이끌림으로 끝없이 자료를 읽어 나가는 베아트리스 쿠르트라는 픽션적 존재가 바로 영화가 보여 주는 것의 진위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다. 허구의 존재가 활동하는 장이기 때문에, 영화 속 캐릭터의 시선을 경유했기 때문에 내 눈앞의 텍스트는 혼란스러워진다. 이 혼돈으로 인해 〈크로노바이저〉는 진실 자체에 대한 사유, 허구와 현실이 미결정의 상태로 놓인 영화라는 장에 대한 사유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작품으로 확장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