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그림자를 숨길 때 When Clouds Hide the Shadow
감독 호세 루이스 토레스 레이바 José Luis TORRES LEIVA | Chile, Argentina, Korea | 2024 | 70min | Fiction | 전주시네마프로젝트
호세 루이스 토레스 레이바의 〈구름이 그림자를 숨길 때〉는 잠든 마리아(마리아 알체)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곧이어 얼굴은 멀리 보이는 섬으로 다가가는 움직임에 디졸브되어 흐릿해지고, 저 멀리 섬과 바다의 물살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는 칠레 감독과 함께 영화를 찍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발해 칠레의 남쪽 끝에 위치한 푸에르토윌리암스로 향하는 중이다. 하지만 기상악화로 촬영팀 도착이 늦어지고, 그는 교통수단이 없는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
푸에르토윌리암스는 7천 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야간(Yaghan)족 공동체와 칠레 해군기지에 주둔하는 군인들이 주민의 대부분인 작은 동네다. 영화는 마리아가 각자의 욕망과 소망을 따라 도달한 ‘세상의 끝’이라는 낭만적인 수사로 가려질 법한 푸에르토윌리암스의 곳곳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고정된 카메라에 담아낸다. 감독의 개입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정적인 숏들에 울창한 숲과 거센 바람에 옆으로 누운 나무들, 곧게 자라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 맑은 강물, 구름이 햇빛 속으로 숨어드는 하늘과 느긋하게 누워 있는 소, 목초지를 달리는 말들이 단정하게 담긴다. 마리아는 자연 풍광만을 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야간족 아기 엄마, 잡화점을 운영하는 야간족 중년 부인, 파리 유충을 채집하는 식물연구자, 워크숍에 참여한 야간족 학생들, 작은 도서관 주인 부부, 숲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야간족 소녀, 전인 치료를 하는 야간족 치유사, 또 자신을 차에 태워준 여성을 만나 야간족의 삶에 대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다정했던 한 남성에 대해, 자연의 주기에 맞춰 살아가는 연약하고 덧없는 곤충의 삶에 대해, 마치 꿈처럼 다가오는 파타고니아의 경이로운 풍경에 대해, 인간이 창조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남극의 풍광에 대해, 슬픔으로 인한 육체의 고통에 대해, 일시적인 마음과 민감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구름이 그림자를 숨길 때〉는 낯선 곳을 찾아온 마리아가 푸에르토윌리암스의 자연을 발견하고 사람들의 삶과 전통에 대해 듣고 배우며 자신의 감정과 연결 짓는 시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호세 루이스 토레스 레이바는 나무와 하늘과 구름과 호수와 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데, 카메라에 포착된 자연은 때론 적막하고 때론 덧없는 우리의 시간 너머에 있을 법한 영원성을 담아낸다. 침착하고 겸손한 감독의 태도는 마리아라는 이방인의 시선과 걸음에 섣부른 모험심이나 강한 충동, 강렬한 감정의 변화를 배제하는 방식을 택한다. 대신 야간족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듣고 현재 그들의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순간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깊숙하게 가라앉은 자신의 상실을 떠올리며 드러낼 수조차 없었던 마음을 들여다보는 마리아의 시간을 따른다.
마리아가 만나는 사람들은 죽음과 부재를 경험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바이올린 연주에 매진하고 자신의 아이를 야간족의 전통을 따라 키우려 하며 광활한 자연에서 가장 작은 생물을 연구하며 살아간다. 마리아는 숭고하고 위대한 자연을 탐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와 생각과 감정을 채집하는 기록자처럼 보인다. 드넓은 곳에서의 가장 세밀한 흔적이 모여 자연의 순환을 만드는 것처럼 마리아 또한 대면할 수조차 없었던 슬픔과 상실이 일깨워준 몸의 통증과, 가장 사랑하던 친구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진실한 애도를 경험한다.
영화의 마지막 숏은 마리아의 얼굴에 디졸브되는 바다로 돌아간다. 첫 숏에서 앞으로 나아가던 배는 이제 횡축으로 이동한다. 망망대해 어딘가에서 시작한 마리아의 여행은 여전히 거친 물살을 따라가지만, 아마 그는 바다 어딘가에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마음이 흐르도록 놓아두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