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감독의 여성 주인공들은 대개 ‘일반’이 요구하는 기준에서 뒤처진 인물들이다. 특히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하게도 시공간의 문제에서 부득이하게 낙오된다. 단편 〈입문반〉(2019)에서 가영은 시나리오 수업을 듣기 위해 매번 서울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온다. 가영은 어엿한 성인임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종의 (시공간적) 규율을 어기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보인다. 통금 시간이나 외박을 한 번쯤 어기는 게 뭐가 대수냐는 가영의 주변 인물들이 전혀 나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 안의 지방 사람’을 체화하고 있는 가영에게 이는 조금 엇갈린 세계를 감각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일과를 마친 후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게 일상이라면 가영에게 그 집은 물리적으로 너무 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제적인 거리가 인물로 하여금 남들보다 세계를 조금 늦게 이해하고 경험하게 만드는 기제가 될 수 있음을 〈입문반〉은 고요한 호흡으로 그린 바 있다. 그의 첫 장편영화 〈흐르다〉(2023)에서도 마찬가지로 취업 준비생 진영은 더 이상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여전히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또렷하게 갖고 있지 못하다. 취업 스터디에서 채용을 대비하는 한편 제한된 나이를 맞기 전에 얼른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가야 하는 조급한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이번 신작 〈서신교환〉에서도 소형(김소형)은 극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지만 내면에서 해결되지 않은 어떤 난제에 봉착해 글을 더 이어 나갈 수가 없다. 마침 다큐멘터리 감독인 형부 주환(박주환)의 요청으로 소형은 그의 영화 촬영을 돕게 된다. 낮에는 카메라로 탄광의 모습을 담고 광부들의 인터뷰를 듣던 소형은 밤이면 배우와 약속된 극영화의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기 위해 읽고 또 쓴다. 그러나 소형에게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촬영과 극작, 취재원과의 관계 맺기와 외부를 차단하고 내면으로 들어가기라는 작업은 각각 서로 너무 멀리에 있는 것들이다. 극영화가 “끝이 분명한 편이니까” 편한 소형은, 다큐멘터리를 위해 모르는 삶에 파고들어 그들과 유대를 쌓는 것을 불필요한 행위라 여긴다.

 

독립영화 안에서도 특히 한정된 규모로 작업한 것 같은 〈서신교환〉에는, 그 소박한 외피와 달리 영화 만들기에 관한 두터운 고심이 엿보인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흔히 아주 상반된 장르이자 형식으로 간주되는 양자가 분리된 이중의 행위가 아니라 서로 다르나 함께 실현되는 것이 가능한 작업(들)임을 소형의 사례를 통해 서술한다. 또한 영화와 삶은 픽션과 리얼, 허구와 진실이라는 명료한 언어들로 자주 요약되는 탓에 서로 매우 다르게 보이지만(그리고 실제로도 정말 다르지만) 어떤 순간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가망이 있음을 〈서신교환〉은 ‘느리게 배우는’ 소형을 통해 진술한다. 무엇보다 나의 손이 오로지 나의 글을 쓰기 위해 움직일 때 어떤 손은 나에게 무언가 건네주기 위해 도착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주는 〈서신교환〉의 ‘교환’의 동작에는, 작고 어설프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마음이 있다. 현장에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타인의 방을 탐구하는 나의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운 침입이 될 수도 있듯, 그러나 그러한 불편 이후에도 함께하는 얼마간의 시간을 거쳐 작은 과일을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내내 이상하게 결락된 어떤 존재에 관한 궁금증이 피어오를 때쯤, 그를 부르며 시작하는(또 끝나는) 이 영화에서 그간 소형의 시선과 손짓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돌이켜 곱씹어 보는 일은 처음 영화를 봤을 때보다 더 애틋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