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구름에 대하여 About the Clouds〉(2022)로 작품상을 받은 아르헨티나의 여성 감독 마리아 아파리시오가 새로운 영화를 들고 올해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느린 속도로, 하지만 끈질기게 OTT와 소셜 미디어가 장악해버린 시대의 시각 예술, 특히 영화의 의미를 탐색해 나간다.

 

주인공 에바는 영화 편집자다. 동료이자 보조 역할을 하는 라미와 함께 시각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를 편집하고 있다. 두 사람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영화 편집자라는 직업에 한층 더 다가가게 된다. 지금까지 감독, 혹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종종 스크린에 등장해 온 것에 반해, 이 영화는 편집자를 통해 영화와 그 제작 과정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에바와 라미는 거의 완성된 영화를 매끄럽게 이어 붙이는 기능적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촬영된 영화의 안팎을 사유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창조하는 세계를 시각화하는 방식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한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는 편집자 역시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창작자 중 한 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에바는 대학에서 영화 이론도 가르친다.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전반부에 그가 강의하는 모습과 학생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장면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독일 비평가 발터 베냐민이 말했듯이 에바에게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미지의 공간이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미지의 조각들을 재배열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만나며, 기억과 사실이 교차하면서 역사와 현실은 다시 해석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의미를 창출하고, 그것의 완성이 바로 ‘영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객들에게 이미지의 의미와 영화에 관해 사유하도록 초대한다는 점에서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매우 지적인 영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에바와 라미는 작업을 마치고 감독에게 다큐멘터리의 편집본을 보여주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고 결국 이 프로젝트는 좌절된다. 이런 경우에 익숙한 에바는 크게 상심하지는 않지만, 정작 그를 절망하게 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다. 과연 영화는 시각장애인과 같은 소외된 이들의 삶을 진정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이론으로서의 영화 이미지와 미학이 현실에서도 그 효용을 지닐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영화가 앞으로 대중을 만날 수 있을까? 에바는 편집자라는 자신의 직업과 영화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회의적 감정과 불확실성은 영화감독이자 자신과 오랜 시간 작업을 함께했던 친구 후안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찾아온 상실의 감정과 연결된다. 자신과 영화, 그리고 자신과 세계를 이어주던 고리와도 같았던 친구의 부재가 가져온 현실을 감당하는 것이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영화는 슬픔과 부재를 감내하는 주인공을 통해 일상의 힘을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에바는 여느 날과 같이 도시를 산책하고, 꽃을 사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차를 마신다. 꽃병의 꽃은 누가 보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로 에바의 거실을 채우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삶은 계속된다.’ 아파리시오 감독은 상실을 극복하는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정의하기 불가능한 것이 세계이자 현실이지만, 그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것이 바로 영화의 몫이자 책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21세기 들어 아르헨티나 영화계는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여 정부 지원이 줄어들면서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실’의 시대에 실험적이고 독립적인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이 흐름은 ‘뉴 아르헨티나 시네마’라는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루크레시아 마르텔이라는 걸출한 여성 감독을 통해 정점을 이루었으며, 이후 일군의 재능 있는 젊은 여성 감독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1992년생인 마리아 아파리시오는 위기가 일상화된 아르헨티나에서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이미지의 힘을 보여주면서 영화 예술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