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칠레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시위는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 사회적 분노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결과적으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아라야 디아스 감독은 이 시위를 묘사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에 유포되었던 다양한 영상들을 수집해서 배열하는 방법을 택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수집한 이질적인 영상들이 모여 하나의 쓰나미와 같은 거센 흐름을 형성한 결과, 2019년 칠레에 관한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한 편의 작품 안에서 펼쳐지게 된다.

 

2019년 칠레에서 전개된 시위의 배경과 전개 과정은 실로 복잡하다. 그해 10월 6일 정부의 지하철 요금 인상에 대한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소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이는 삽시간에 전국적 단위의 사회 변혁 요구 운동으로 번졌다. 정부에서는 이례적으로 비상사태와 야간 통행 금지로 대처했지만 그런 조치는 시위대의 분노를 더 키울 뿐이었다. 시위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은 교육, 의료, 연금, 젠더, 환경 등과 같은 다양한 의제에 대해 논의했고, 급기야 피노체트 정권 때 만들어진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적 간극은 칠레가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다.

 

〈춤추는 사람만 지나갈 수 있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논픽션, 특히 다큐멘터리의 제작 방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카메라가 기록한 현실성을 중시하지도, 그렇다고 카메라가 기록한 현실을 인과관계에 따라서 나열하거나 설명하지도 않는다. 대신 기존의 영상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영화 방식을 따르면서, 2019년 10월 6일 이후 숏폼 동영상 콘텐츠를 공유하는 여러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유포된 영상들에서 나타난 어떤 사회적 풍경을 제시한다. 그 영상들은 시위가 발발한 초기에 나타난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 시위대와 경찰의 물리적 충돌, 도심의 주요 공간을 점거하고 그곳에 소요 사태를 일으키는 시위대의 모습, 길거리 낙서, 거리 또는 온라인에서 의견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등을 담고 있다. 그 다양한 풍경과 목소리에 담긴 불안, 분노, 희망 등의 감정은 LCD 액정이나 LED 스크린과 같은 디스플레이 장치에 주로 쓰이는 세로로 길게 늘어지는 화면 형식을 통해서 표현되고 또 전달된다. 이는 이제 혁명에 관한 기록과 보관은 물론 그 혁명에 관한 사유까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2019년 이후 칠레의 사회적 변화를 동시대 미디어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동시대 미디어 기기와 플랫폼의 형식을 매개하거나 모방한 것이지 영화 그 자체는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까?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 작품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지만, 여전히 이것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카를로스 아라야 디아스 감독은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카메라를 든 누군가가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 발걸음은 시위가 발발했던 칠레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2019년 10월 이후 칠레의 사회적 변화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 또는 그 변화에 참여한 누군가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어느 가게의 창문 너머에 앉아 사색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칠레로 향하는 누군가의 발걸음과 생각에 잠긴 듯한 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서 영화는 작품 전체에 이야기의 구조를 구축한다. 또한 이러한 연출적 요소를 통해서 이 작품이 단순 기록물의 수준을 넘어 특정 사회적 사안에 관한 이야기이자 사유의 실험으로 거듭날 수 있게 만든다. 이처럼 〈춤추는 사람만 지나갈 수 있어〉는 칠레의 사회적 변화를 동시대 미디어 환경을 통해서 사유하려는 연출자의 자기 반영적 의식이 두드러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