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 Pamir
감독 오멸 | Korea | 2023 | 95min | 코리안시네마
총 3장으로 나뉜 〈파미르〉는 2014년 4월 16일이라는 날짜와 세월호라는 선박의 이름을 명확하게 호명하며 시작한다. 관객을 초조하게 만드는 선언이다. 여전히 수습되지 못한 사건의 무게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리라는 염려 때문임은 물론, 뉴스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에서 그 이름을 또렷이 지시하는 시도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 때문이다.
〈파미르〉는 초반부 자막에서 설명하듯 “새롭게 구성된 드라마”이면서도 모든 국민이 아는 대형 참사를 똑똑히 언급하길 에두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 날짜와 그 배의 이름은 하나의 동떨어진 시간과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픽션의 가능성은 확고하게 닫힌다. 우리는 이 거대한 자리를 획득해버린 대상을 외면하고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달리 말해, 세월호는 언제쯤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반드시 일부가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함께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파미르〉는 생존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1장 ‘죄인’은 딸이 타고 싶어 했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홀로 오른 아버지의 방황기다. 2장 ‘날벼락’에서는 학교 밖 청소년 설이가 죽은 남자친구의 어머니와 처음 대면하게 된다. 3장 ‘파미르’는 오멸 감독이 2017년 연출한 동명 단편의 많은 부분이 반영된 챕터로, 친구가 꿈꾸던 장소였던 파미르고원에 그의 자전거와 동행하게 된 청년의 여정을 다룬다.
각 장의 주요 인물들은 희생자들을 통해 이어져 있지만 연결을 꾀하기보다는 느슨하게 중첩된다. 이 질서를 따라 〈파미르〉에서 우리는 수시로 재난을 전경화한 이미지들과 마주하게 된다. 어두운 바다에서 수색 작업에 힘쓰는 잠수사,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올리는 극우 사이트 유저들, 사건 발생 당시 급작스럽게 좌초하던 배와 구명조끼를 차고 친구를 구하러 가는 인물 등 이 참사를 통과하며 모두가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정보들이 거의 강제되다시피 등장한다. (‘현실적’이 아니라) 현실의 환기를 강제하는 이미지들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 장면들은 대개 틈입하는 방식으로 오락가락하며 등장하기에, 참사의 인과나 전후 사정은 뒤로 물리는 대신 ‘지금’ 남아 있는 이들에게 내려꽂히는 기억처럼 존재한다. 배가 급격히 기울던 순간의 힘은 지금 타고 있는 자전거와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핸들을 꺾고 갑자기 쓰러지게 만드는 기제다.
동시에 이 장면들이 내장하고 있는 분명한 감각은 서로 ‘함께할 수 없음’이라는 사태다. 이별은 거리를 감각하는 것이므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던 부녀가 바로 다음 신에서는 아주 먼발치에 서서 서로 분리되어 있다거나, 연인임에도 한 명은 학교에 다니고 다른 한 명은 다니지 않는다는 설정이 전제된다거나, 재난 현장에서 발걸음을 돌려세울지 말지를 고민하느라 생긴 거리를 지시하는 방식이다. 이 간극의 이미지들은 기억과 연동되어 생존자들의 현재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한편 〈파미르〉는 현실을 아프게 자극하면서도 은밀하게 판타지를 작동시킨다. 가령 1장에서는 죽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고 심지어 만져지는 비통한 실감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2장에서는 번개가 쳐 교회의 십자가를 떨어뜨리는 예기치 못한 블랙 유머까지 들어 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유독가스나, 동물의 뼈를 뜯어 먹는 괴이한 식사는 또 어떤가. 3장의 광활한 고원의 풍경과 몽골 소년 등은 이 장 자체가 마치 꿈으로 보일 정도로 생경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파미르〉에는 현실의 전면화와 환상의 표상이라는 모순적인 양자가 어지럽게 서로를 수용하며 혼재한다. 한 인간을, 많은 인간을, 그리고 그 인간들의 사이를 찢어놓은 재난의 여파는 첨예한 현실과 거기에 들러붙은 허구적 상상을 동반하면서 내내 지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