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The Innocents
감독 에실 보그트┃Norway┃2021┃117min┃불면의 밤
백인 중산층 이성애 핵가족이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는 차 안. 운전석엔 아버지, 보조석엔 어머니, 그리고 뒷좌석엔 두 자매가 나란히 앉아 있다. 자폐성 장애인인 언니 안나는 반복적으로 “어, 어, 어, 어” 하는 소리를 내고 다소 짜증이 난 듯한 동생 이다는 어머니 쪽 눈치를 살짝 본 뒤 슬그머니 손을 뻗어 안나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튼다. 안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여전히 같은 소리를 반복적으로 낼 뿐이다.
어느 날 문득 초능력이 생긴다면
에실 보그트 감독의 〈이노센트〉는 여느 평범한 북유럽 성장영화와 다르지 않은 장면으로 시작한다. 부모는 안나만 신경 쓰고, 좀 더 세심하게 보살펴야 하는 언니 때문에 너무 빨리 성장해야 하는 이다는 그 서운함과 울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다가 또래 친구 벤을 사귀게 되면서 영화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틀어진다. 그리고 놀라운 염력의 세계가 펼쳐진다.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하면서 늘 혼자 놀던 벤에게는 비밀이 있다. 병뚜껑처럼 작고 가벼운 물건 정도는 손을 대지 않고도 옮길 수 있는 염력을 가진 것이다. 이다는 새 친구의 놀라운 능력에 흥분하지만, 곧 고양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버리는 벤의 폭력성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한편, 안나도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우울증이 심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이샤다. 아이샤는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의 생각과 마음을 느끼고 당황하는데, 그것이 안나의 내면의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선한 의지를 가진 아이샤는 안나의 입이 되어주고, 아이샤 덕분에 안나의 자폐 증세도 조금씩 호전된다. 이와 함께 안나의 염력 역시 깨어난다. 아이샤는 안나와 세계를 매개하는 영매인 셈이다.
이다, 안나, 벤, 아이샤는 함께 어울려 다니면 서 각자가 가진 초능력을 비교해본다. (이다에겐 초능력이 없지만, 그는 네 사람의 구심점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네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네 사람의 관계 안에서 벤의 염력은 점점 더 강해지는데,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세상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는 벤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벤을 막으려고 하지만 벤의 힘은 막강하다. 참극이 이어지고, 영화는 빛의 염력을 가진 안나와 어둠의 염력을 가진 벤 사이의 최후의 대결을 향해 점점 더 고양된다.
어른들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에실 보그트는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했던 〈델마〉(요아킴 트리에르, 2017)에서 이미 ‘초능력을 가진 소녀’라는 장르적 프레임을 경유해 아이, 특히 여자아이의 힘을 두려워하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떻게 아이의 가능성을 죽이고 길들여 축소시키려 하는지 잘 보여준 바 있다. 주인공 델마의 부모는 강력한 안정제로 끊임없이 델마를 잠재우려고만 할 뿐, 델마가 힘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결국 델마는 스스로 힘을 키워 자신을 새장에 가두려고 했던 부모에게 복수한다.
〈이노센트〉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볼 수 없는 비밀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만의 깊고 넓은 세계를 구축한다. 이 세계에는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다. 영화에서 염력은 위험한 능력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사회화의 과정을 지나온 어른들이 잊었거나 혹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만의 정서의 강도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놀라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