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데미안 루그나 Demián RUGNA | Argentina | 2023 | 100min | Fiction | 불면의 밤
아르헨티나 오컬트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 데미안 루그나 감독의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아르헨티나 공포영화 사상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자, 작년 한 해 이 나라 관객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였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판타지 영화 축제인 2023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인 성공까지 거두게 되었다.
오컬트와 뒤섞인 공포 서사의 유행은 최근 아르헨티나 문학과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중 하나다.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인 요소가 포함된 이 장르는 언뜻 보기에 아르헨티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오랫동안 남미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부유하며, 유럽화된 국가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경제 위기와 경기 침체가 반복되었고, 최근까지도 초인플레이션과 빈곤율을 기록하는 등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졌다. 이에 지성계에서는 독립 이후 사회의 근간이자 모델로 지향점 역할을 했던 서구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 성찰이 진행되고 있다. 동시에 근대화 과정에서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이라며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악귀, 심령술, 퇴마, 무속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 역시 세대를 거쳐 내려오던 시골 민담과 악령의 출몰을 통해 21세기 아르헨티나 사회를 해부한다. 이혼남인 페드로(에세키엘 로드리게스)와 지미(데미안 살로몬) 형제는 루이스 씨의 대농장에 살고 있다. 이들은 어느 날 근처에서 우연히 시체를 발견하게 되고,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농장에 고립돼 사는 원주민 마리아 엘레나(이사벨 킨테로스)의 집을 방문한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다. 마리아는 큰아들 우리엘의 몸에 악령이 들어왔다고 호소한다. 페드로 형제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농장 일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한편, 농장주인 루이스 씨는 형제를 동원해 우리엘을 끌어내고 트럭에 태워 자신의 땅 밖으로 내쫓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자전거를 탄 어린아이를 칠 뻔한 사건이 벌어지고 한순간 우리엘의 몸은 사라져 버린다. 처음에는 이 초자연적 현실을 믿지 않던 페드로 형제는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사람에서 동물로 몸을 옮겨 다니는 악귀를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멀리 달아나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도망칠수록 악귀는 곁을 떠나지 않고 가족들은 더 큰 위험에 빠진다.
루그나 감독은 공포의 롤러코스터 속에서 시골 마을의 다양한 사회 계층을 등장시킨다. 접점이 존재하지 않던 대농장주, 경찰, 여성, 가난한 원주민, 어린아이는 악귀가 출몰하는 과정에서 만나고 연결된다. 이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동정심이나 유대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강자들은 힘과 권력으로 약자를 제압하려 하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전략으로 일관한다. 당연하게도 약자들의 삶과 생명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가운데에 끼어 있는 중간 계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의 주인공 페드로 형제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루이스 씨의 강압에 복종하면서 원주민 가족들의 애원을 무시하고 우리엘을 치우는 작업에 협조한다. 또한 자신들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다쳤을지 모르는 소년을 무시하고 떠나버린다. 악귀가 전염되는 마을에서 가족을 데리고 탈출하는 것에만 골몰한다. 주변의 약자와 이웃을 버려둔 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지만 페드로 형제를 기다리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비극적 결과다.
〈악이 도사리고 있을 때〉는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악귀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페드로가 사라진 아들을 찾기 위해 간 학교의 마루 밑에서 발견한 시체 더미는 과거 군사 독재 시대의 희생자들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시체들 속에서 자신이 유기한 우리엘을 발견했을 때 페드로는 비로소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닫는다. 영화는 긴장 넘치는 스릴감과 소름 돋는 공포감을 제공하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공동체에 닥친 위기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 윤리적인 질문에 우리가 제대로 답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결과가 바로 악이 지배하는 폐허의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