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전주시네마프로젝트 넥스트에디션에 선정되어 제작된 이 작품은 1978년 10월,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우파 계열의 학생 두 명이 좌파 계열의 학생 다섯 명을 살해한 사건을 다룬다. 1923년 독립을 선포한 이후 튀르키예의 역사는 총 세 번의 군사 쿠데타와 그 과정에서 불거진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특히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1970년대는 노동자, 학생, 농민을 중심으로 좌익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던, 그리고 좌익 진영과 우익 진영 사이에서 폭력 사태가 빈번했던 시기이다. 연출자인 부라크 체비크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70년대 후반 양쪽으로 갈라진 세상의 요동”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작품의 제목은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세상의 무질서와 혼돈을 반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각하는 물리적 현실에서 하나의 대상이 제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상이 스스로 움직이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대상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경우다. 〈제자리에 있는 건 없다〉의 내용은 어떤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상황이 불안정한 상태와 관련이 있다. 전반부는 좌익 계열 학생들이 사회 혁명과 그것의 구체적 수단으로서의 신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부는 우익 계열 학생들이 좌익 계열 학생들을 포박하고, 겁박하고, 비난하고, 구타하고, 끝내 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튀르키예의 역사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다양한 요소들의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복잡하게 흘러갔음을 암시한다. 주목할 부분은 이 영화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느 한쪽에 편향된 시선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78년 10월의 어느 날 밤에 일어난 역사적 비극을 다룬 이 작품의 내용은 시간의 지속과 공간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연출 방식을 통해서 표현된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 연극적인 미장센과 연기, 심도가 깊은 화면, 평면성, 원 테이크 또는 롱테이크, 디지털 합성, 가상 카메라 기법 등이 이 작품에 주요 연출 방식으로 쓰였다. 한 집의 내부를 세트처럼 활용하고, 배우들이 쉴 새 없이 대사를 주고받고, 그런 장면을 심도가 깊은 화면 속에서 담아낸다. 대체로 롱테이크로 촬영된 그 장면들은 관객인 우리에게 시공간이 단절 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고유의 사실주의적인 양식을 획득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의 모든 장면이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종종 카메라는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다가 부차적인 요소들을 오랜 시간 비춘다. 실내 전등을 비추는 장면을 예로 들자면, 부동의 사물로서의 전등은 화면 상단에서 하단으로 향하는 전등의 불빛, 오프스크린 곳곳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대화 소리, 그리고 화면 하단에서 상단으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등과 어우러져 정지와 운동, 집중과 분산, 중심과 주변, 안과 밖,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에 관한 관객의 감각을 뒤흔든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관객의 감각적 지각의 방향 상실이나 일시적 정지를 유도하는 연출 방식을 종종 활용한다.

 

그런 이유로 관객은 이 작품이 다루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해서 ‘제자리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인 우리가 역사에 관한 판단과 정의를 내리는 과정에서 무기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누구도 흘러가는 역사를 붙잡거나 그것을 의미의 사슬 안에 가둘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무기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감독은 카메라의 자율적인 움직임과 시선에서 최후의 희망을 보는 듯하다. 현실의 지속을 장시간 동안 기록할 수 있는, 그리고 물리적 세계의 장벽을 뚫고 안과 밖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카메라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이 작품 속 세계에서 오직 카메라만이 자신에게 할당된 자리를 지키면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그것은 비록 영화는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역사를 바라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역사적 시간의 무질서를 영화적 시간의 질서로 바꾸어 놓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