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성이 한집에 산다.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알려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강유가람 감독의 〈럭키, 아파트〉는 레즈비언 커플이 입주한 어느 아파트에서 발생한 고독사와 그로 인한 이웃 사이의 갈등을 주요한 이야기로 삼는다. 선우(손수현)는 일자리를 잃고 다리까지 다쳤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집 안팎으로 퍼지는 악취를 맡게 된다. 관리실에 확인을 부탁하지만 냄새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는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해결에 무심하다. 아무리 집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소독해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자, 선우는 악취의 원인이라고 짐작되는 아래층으로 어렵게 발걸음을 옮긴다.

 

오랫동안 퀴어에게는 가시화의 문제가 중요했다. 분명히 있지만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고, 심지어는 선명하게 보일 때조차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럭키, 아파트〉는 스크린이 표면에 즉각적으로 옮겨낼 수 없는 냄새라는 후각적 장치를 주요한 모티브로 설정하여 이 가시화의 문제에 접속시킨다. 냄새는 난다. 그러나 우리-관객에게까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선우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유, 그리고 그 냄새가 나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인 이유는 그 또한 그 냄새에 물든 문제를 깊게 떠안고 살아온/살아갈 사람이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럭키, 아파트〉는 이 악취의 정체를 확인하는 여정을 단지 불만 어린 주인공의 욕구 해소나 서스펜스를 위한 기제로 다루기를 매우 경계하는 듯 보인다. 대신 선우와 희서라는 두 연인의 소수자성과, ‘노인 고독사’라는 (상대적으로) 보편적이고 ‘사회 일반’의 문제로 여겨지는 현상이 각자의 실금 사이로 스미며 마주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결과적으로 주인공의 자기중심적 발전이나 성장을 위한 장치로 온건하게 이용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우리가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럭키, 아파트〉가 나의 불편이던 것이 어째서 내가 반드시 동참해서 해결해야 할 주체적 문제로 여겨지는지를 원만하게 납득시킨다는 사실이다. 이에 더해 선우의 ‘냄새 찾기/없애기’의 경로에는 불법과 위반, 반칙 등의 행위가 수반된다. 초반부에 고독사 현장을 발견한 선우에게 동 대표는 말한다. “소문 나서 좋을 건 없잖아요.” 보이지 말라는 주문. 그리하여 나의 어떤 행위가 타인에게 눈엣가시가 된다면, 그들에게 차라리 ‘보이지 않으려’ 어둠을 택해야 하는 순간들도 필요한 셈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닐 수 있는 (유약한) 힘이기도 하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럭키, 아파트〉에서 폭로가 사용되는 방식이다. 굳이 압축한다면 영화에는 두 번의 폭로가 등장한다. 그러나 먼저 등장하는 폭로란 소수자성을 지닌 당사자로서 다른 이들보다 더 감지하기 용이한 모종의 상태를 감각하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 ‘폭로’라고 부를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밝혀지고 해결되는 종류다.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면 후반부에서 두 주인공을 상대로 벌어지는 어떤 파렴치한 폭로는 정작 당사자들을 완전히 배제한 채 불특정 다수가 논리와 합리를 빙자하며 벌인다. 당사자가 자신이 이입 가능한 쪽의 소수자성을 수용할 때 이는 별도의 언어를 요구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언어의 지시(가령 ‘대사’나 특정한 단어 표현) 없이도 의미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정상성을 요구하는 다수의 혐오가 아웃팅을 자행하는 장면은 여러 인물의 내레이션과 문자 메시지를 통해 언어의 오염을, 그리고 그 언어가 포화하는 사태를 전면적으로 표현한다. 〈럭키, 아파트〉는 이렇듯 또렷한 목소리로 우리 각자에게 배어 있는 냄새를 확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