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 리틀 레터스 Wicked Little Letters
감독 테아 샤록 Thea SHARROCK | France, UK | 2023 | 100min | Fiction | 월드시네마
1920년대 영국 리틀햄프턴을 배경으로 하는 이 블랙코미디는 100년의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현재적이고 머나먼 지역 차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지는 ‘보편적’인 정서를 다룬다. 영화가 모티프로 삼고 있는 중요 사건은 ‘포이즌 펜 편지(poison pen letter)’인데,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중상모략 편지’ 정도가 되겠지만 2024년 한국에 맞게 업데이트 한다면 ‘편지에 쓴 주작 악플’이라 옮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포이즌 펜은 20세기 초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등장했던 현상이다. 이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비방 편지를 보내 주변인들을 괴롭히는 악의적인 범죄다. 이 편지의 독성(poison)은 치명적이어서, 때로 피해자의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거짓 폭로로 가정이 깨지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명예가 실추되기도 했던 탓이다. 온라인상의 각종 악플과 사이버불링이 생각나는 이유다.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위를 누리던 이들이 편지를 쓴 범인으로 밝혀지는 등 당시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기도 했으므로, 포이즌 펜은 종종 스릴러 영화와 추리 소설의 소재가 되곤 했다. 〈위키드 리틀 레터스〉는 포이즌 펜 실화 사건을 블랙 코미디의 경쾌한 템포와 함께 스크린으로 옮겼다.
리틀햄프턴에 살고 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중년의 독신 여성인 이디스 스완(올리비아 콜먼)은 집안의 독재자이자 강압적인 가부장인 아버지 에드워드와 오랜 세월 그런 남편에게 맞추며 살아온 순종적인 어머니 빅토리아와 함께 살고 있다. 이디스는 입에 담기도 어려운 온갖 음란한 묘사와 욕설로 그를 모욕하는 편지를 열아홉 통이나 받으면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중이다. 에드워드는 범인으로 옆집 여자 로즈 구딩(제시 버클리)을 지목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로즈는 평소 입이 거칠 뿐만 아니라 행동도 자유분방했으며, 최근 스완 가족과 불화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표면 아래에는 또 다른 이유가 놓여 있다. 로즈는 아이를 혼자 키우는 싱글맘이자 흑인 애인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일랜드 이민자였던 것이다. 각종 편견 덕분에 경찰은 로즈가 범인이라고 쉽게 판단하고, 제대로 된 수사도 없이 그를 체포한다.
이 와중에 리틀햄프턴의 유일한 여경인 글래디스 모스는 증거가 부족하고 필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로즈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는다. 그러나 백인 남성 중심적인 경찰서의 위계 안에서 인도계 여성인 글래디스의 목소리는 한낱 투정으로 여겨질 뿐이다. 수사에서 배제된 글래디스는 홀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결국 명령 불복종으로 해고당한다. 여기서부터 글래디스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하지만 관객은 이미 누가 진짜 범인인지 알고 있다. 영화는 2020년대의 훈련된 관객들에게 범인의 정체 따위는 대단한 비밀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모든 정보를 관객과 공유함으로써 로즈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함께 움직이는 여성 연대의 활동을 마음껏 즐기도록 유도하고, 투명한 로즈와 음흉한 이디스를 연기하는 위대한 두 배우의 기예에 관람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호쾌한 무대를 펼친다.
그리하여 영화의 매력은 추리 과정이 아닌 올리비아 콜먼과 제시 버클리,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캐릭터에 놓여 있다. 올리비아 콜먼은 억눌린 욕망과 분노를 속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채 속박된 삶을 견디는 이디스의 부조리한 심리 상태를 그의 신체를 통해 조각해 낸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와 〈로스트 도터〉(2021)에서 보였던 불안하게 흔들려서 때로는 두려움까지 자아내는 콜먼의 기묘한 표정은 이 영화에서 드디어 코미디의 얼굴로 전화했다. 돌이켜 보면 콜먼은 언제나 정색한 표정 뒤로 기묘한 웃음을 숨기고 있었다. 〈로스트 도터〉에서 젊은 콜먼을 연기했고 〈멘〉(2022)에서는 가부장제라는 괴물에 맞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기질적으로는 저항적인 여성을 연기했던 제시 버클리는 로즈라는 캐릭터를 만나 감정 제어의 빗장을 걷어내고 해방된 영혼이 지닌 자유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시킨다. 놓치기 아까운 볼거리다. 무엇보다 올리비아 콜먼의 마지막 2분을 위해서라도, 앞의 모든 이야기를 따라갈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