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난 해 Letters from the Shattered Years
감독 오민욱 OH Minwook | Korea, Taiwan | 2024 | 90min | Experimental Documentary | 코리안시네마
“밀봉된 과거를 열어 미래로 향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붙잡아 두며.” 오민욱 감독의 〈산산조각 난 해〉는 시간의 성질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 따르면 시간은 과거 어딘가에 밀봉되어 있다가 봉인이 풀리면 아무렇게나 뻗어 나가는 것, 그래서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그 어떤 것이다. 밀봉된 과거를 열면 시간은 마구 쏟아져 내리며 우리를 덮칠 것이다. 영화엔 2011년부터 2024년 사이에 찍힌 장면들이 두서없이 나열돼 있다. 흑백 처리된 그 장면들은 매끄러운 영상이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스틸 사진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모양을 하고 있다. 영화의 이미지들은 마치 재생된 영상을 마구 캡처했다가 다시 붙여놓은 듯 이상하게 분절돼 있다. 버퍼링이 걸린 듯 화면이 버벅거린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때로 그 이미지들은 뒤로 감기를 한 듯 거꾸로 배열된다. 사람은 뒤로 걸어가고, 눈송이는 하늘로 올라간다. 바다 깊은 곳에서 녹음된 듯한 사운드는 귀를 먹먹하게 한다. 이 영화는 봉인이 풀린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한다. 관객은 눈앞의 화면에 편안히 안착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표류한다.
〈산산조각 난 해〉가 만드는 이러한 감각은 ‘육지 사이에 끼어 있는 좁고 긴 바다’, 오민욱 감독의 이전 작품 제목이기도 한 ‘해협’을 생각나게 한다. 폭이 좁기에 자칫하면 물살에 휩쓸리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위험한 바다 말이다. 감독은 동아시아에 남은 전쟁의 상흔을 더듬는 〈해협〉(2019)을 만들며, 대만 해협 아래서 안식처 없이 표류하는 원령들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물론 〈산산조각 난 해〉에 그러한 부분이 분명히 언급돼 있는 건 아니다. 새로운 영화와 〈해협〉 사이의 관계는 여기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산산조각 난 해〉는 감독과 〈해협〉을 함께 만들었던 대만 여성 샤오가 오민욱 감독과 몇 차례 주고받은 편지들로 이뤄져 있다. 두서없는 흑백 이미지들 위로 편지를 읽는 샤오의 목소리가 겹친다. 맨 처음 등장하는 편지는 감독의 결혼을 축하하며 샤오가 보낸 것이다. 샤오는 함께 영화를 만드는 동안 감독이 문득 결혼 이야기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수신인의 행복을 다정하게 빌고 있다. 이어지는 편지는 이에 대한 감독의 조금 늦은 답장들이다.
과거로부터 날아든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또 세상에 편재하는 여러 간극을 일깨운다. 두 사람이 타이난에서 언어와 문화의 간극이 확실한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는 감독의 회상처럼, 둘은 편지를 주고받을 때뿐 아니라 그들이 함께 있을 때도 간극을 사이에 둔 존재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성장해 다른 언어로 말하는 이들이며, 헤어진 후에는 각자 다른 대륙을 오가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다. 편지는 그 사이를 일깨우는 동시에 일시적으로 좁힌다. 편지가 매개하는 간극에는 시간 또한 포함된다. 과거에 쓰여 미래에 도착하는 편지는 그 안에 다양한 시간을 품는다. 편지를 쓰는 이와 읽는 이는 모두 과거, 현재, 미래를 나름대로 더듬으며 편지에 접속한다. “시간을 말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 “시간의 경계라는 것을 언어로 옮기는 게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보고 있어.” 편지를 읽고 쓰며 감독은 시간을 구분하고 명확히 기술하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여기저기에 겹쳐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간의 본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산산조각 난 해〉는 그러한 간극 속에서 영화의 원리를 찾는다. 감독에게 영화는 “나의 눈과 너의 목소리”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포착한 이미지에 너의 목소리가 들어올 때, 내가 쓴 편지가 너의 목소리로 읽힐 때, 비로소 영화는 성립한다. 한편 보이지 않는 화면의 뒤편에서는 실행되지 않은 영화가 재생된다. 감독이 머릿속에서 완성했다는 그 영화들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구획된 시간을 넘나들며 표류하는 유령을 불러내는 일과 무척이나 가깝다. 〈산산조각 난 해〉가 말하는 영화에는 이미지와 내레이션의 간극 속에서 능동적인 관람을 요청받는 관객의 자리 또한 포함된다. 감독의 전작 〈해협〉과 〈유령의 해〉(2022)를 본 관객과 보지 않은 관객에게 〈산산조각 난 해〉는 다른 관람 경험을 안기겠지만, 그 다른 경험들 역시 영화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처럼 산산조각 난 파편들 위에서, 좁힐 수 없는 간격 위에서 영화가 되어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