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문자 Hidden Letters
감독 바이올렛 두 펑 | China, USA, Norway, Germany | 2022 | 86min | 월드시네마
누슈(女書)는 중국 남부 지방의 여성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전해져 내려온 독특한 고대 언어다. 난슈(男書)인 한문을 배우는 것이 금지된 여성들은 암호처럼 누슈로 자기들의 생각과 삶을 기록하고 공유해왔다. 여성들끼리만 읽고 쓴 문어이기에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피폐해진 삶에 대한 한탄과 자매애를 담은 노래와 산문이 대부분이다. 이 비밀스러운 의사소통 체계는 가부장제 구속하에 있던 여성들의 생존 코드였다. 1980년대 후반 누슈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연구되면서 이 매혹적인 비밀 문어를 소재로 하는 문학 작품과 다큐멘터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다큐멘터리 〈누슈: 여성의 언어〉(양 유에칭, 1999)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소설 『설화와 비밀의 부채』(리사 시, 2005)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누슈를 가부장제하에서도 숨길 수 없는 여성들 간의 우정과 사랑을 보여주는 희망적인 언어로 의미화한다.
바이올렛 두 펑이 감독한 다큐멘터리 〈비밀 문자〉는 누슈를 주제로 하면서도 과거의 유산을 넘어 현재적 맥락과 가치를 탐구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영화는 중국 남부 진양의 누슈 박물관 가이드이자 누슈 계승자인 후신과 누슈를 이용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상하이 기반의 음악가 시무를 통해 누슈를 계승하고 현재화하는 것의 의미를 질문한다. 처음 누슈가 알려질 때만 해도 누슈 연구를 탄압했던 공산당 정권은 세월이 지나 누슈를 진양의 주력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박물관 관장과 지방 정부 관리들은 누슈를 현대화한다며 티셔츠, 벨트, 금 숟가락 등에 새기거나 KFC와 제휴 상품을 만들고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작해 상품화하는 것에 열을 올린다.
역설적인 것은 누슈가 본래 읽히고 쓰인 이유를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품을 팔고 있는 남자 직원은 누슈가 여자들이 남자들을 잘 보살피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설명하고, 박물관 전 관장은 누슈가 여자들의 삼대 미덕인 복종, 수용, 유연성을 함의한다고 주장한다. 관객들은 박물관에서 관람자들에게 누슈를 써주며 홍보를 하는 여성 가이드들을 희롱하고, 누슈를 주제로 한 국제 컨퍼런스에서 대표로 나와 사진을 찍는 이들은 모두 남성이다. 심지어 여자아이들에게 조신하게 걷고 남자들에게 잘 보이는 법을 가르치는 퇴행적인 ‘프린세스 캠프’라는 곳에선 누슈를 아예 가부장제적 가치를 전하는 언어로 선전한다.
가부장제 억압을 기록하고 자매애를 키우는 언어였던 누슈가 공적 공간에 전시되고 이용되며 오히려 여성들의 평등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상황은 현재 중국의 공적 공간이 얼마나 성 불평등한지를 증명한다. 이 아이러니 혹은 모욕의 순간들에 영화는 스쳐지나가듯이 불편한 몸짓을 하거나 은밀하게 서로 보호의 시선을 주고받는 여성들을 포착한다. 어쩌면 누슈는 그 비밀스러운 눈짓과 몸짓 속에서 현재화되며 말해지고 기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음악가 시무는 약혼자에게 결혼을 승낙하는 편지를 누슈로 써 건네고 그가 해독할 것을 요청한다. 시무가 누슈로 편지를 쓴 것은 결혼 생활에서 평등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약속해달라는 의미였지만 약혼자는 그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저 문자 해독에만 집중한다. 약혼자는 시무의 누슈 작업을 돈이 되지 않는 취미로 여기며 그만둘 것을 종용한다. 현대 중국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이중의 부담을 지닌다. 도시에서 어엿한 중산층으로 살기 위해 집을 살 돈을 함께 벌고 집안일도 도맡아야 한다. 시무는 결국 파혼을 결심한다.
이 영화에서 누슈가 정말로 현재화되고 그 가치를 빛내는 순간들은 상품화를 내세운 (남성중심적) 공적 공간이 아니라 여성들만의 세계에서 실현된다. 후신이 누슈를 배우는 마지막 전통 실행자인 허얀신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다시 다른 소녀들에게 누슈를 가르칠 때 누슈는 살아남게 된다. 그리고 시무가 자신의 누슈 작품 전시에서 다른 여성들과 누슈의 가치를 토론할 때 누슈는 여성들의 생존 코드 로서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