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6년 전주국제영화제의 게스트 시네필 프로그램인 ‘페라 포르타베야: 다채로운 필름메이커’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으며, 여러 나라에서 상영, 프로그램, 세미나, 출판 등을 통해 감독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프로젝트 ‘Acció Portabella’에 포함된다.
이 글은 이번 영화제 상영작들을 출발점 삼아 그의 작품이 지닌 다형적 성격을 부각하면서 포르타베야 형식의 정치학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다. 이때 형식의 정치학은 영화를 단순한 미학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고 사고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개입하는 하나의 실천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1

세상에서 한 입장을 취하는 방식으로서의 영화
페라 포르타베야(1927년 스페인 피게레스 출생)는 유럽 영화사의 결정적인 영화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중요성은 〈뱀파이어〉(1970), 〈음지〉(1972), 〈제너럴 리포트〉(1976), 〈바르샤바 다리〉(1989), 〈바흐 이전의 침묵〉(2007)과 같이 변혁적인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듯 60년이 넘는 경력에 걸쳐 현재를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영화적 입장을 지속해 왔다는 데 있다. 그는 매 작품에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란 영화가 단순히 소재를 바꾸거나 유행을 따름으로써가 아니라 무엇이 보이고 말해질 수 있는지를 조직하는 가변적 코드들에 개입함으로써 변화한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그에게 ‘형식’은 외피도 추상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명시적인 논쟁에도 앞서 영화라는 실천 자체로부터 무엇이 출현하고 표현될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전장이다.
그의 시선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나타나는 이중의 거부, 즉 미학에 탐닉하지도 않고 고발에 머물지도 않는 태도로 알아볼 수 있다. 대신 그는 각 시대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헤게모니적 기호들을 탈프로그램화할 형식을 모색한다. 프랑코 독재 정권기에 그것은 바로 권위주의적 거세와 퇴행적인 질서 의식의 기호들이었다.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에는 국제 금융 시스템의 명령과 갈등 봉합의 기호들이었다. 오늘날 그것은 포화 상태를 통한 정상화와 모든 대안적 가능성의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기호들이다. 세 시기에 모두 포르타베야는 하나의 입장에서 출발한다. “언어적 코드들에 근본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포기할 수 없는 과업이다.”2 그에게 영화란 바로 그 과업의 이름이다.
백지를 통한 중지
포르타베야의 모든 영화는 그 자신이 말하듯 어떤 도전 앞에서 시작된다. “영화를 구상하기 위해 언제나 백지 앞에 나 자신을 데려다 두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의 조건 속에서 하얗고 텅 빈 스크린에 도달하는 가장 짧은 길이다.” 또 그는 말한다. “백지는 창조적 자유와 동의어이며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같다. 그것이 시작이다.”3 그리고 덧붙인다. “기존 모델들이 눈앞에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것들에 등을 돌려야 한다.”4 여기서 백지는 언어 이전의 순수성이나 영감의 도래를 기다리는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정밀한 비판적 작업이다. 포르타베야는 그와 세계를 매개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유산처럼 상속된 형식들을 더는 신뢰하지 않으며 기존 질서의 통사론에 포섭되지 않은 말하기의 가능성 자체를 개시한다.
이 지점에서 자크 랑시에르와의 유의미한 교류가 발생한다. 랑시에르는 실러의 ‘미적 상태’를 “중지의 순수한 사례, 형식이 그 자체로 경험되는 순간”5으로 읽어 냄으로써 중지를 단순한 장식적 철수 이상의 무언가로 여기게끔 한다. 중지란 감각적인 것의 질서를 조직하는 위계, 즉 누가 가시적이고 누구에게 발언권이 있으며 무엇이 경험으로 간주되는지에 관한 위계가 비활성화될 수 있는 간극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치가 이미 분할된 지도 안에서 의견들을 대립시키는 일이 아니라 보이고 말해지고 사유될 수 있는 것의 분배 자체를 바꾸는 일이라면, 포르타베야의 백지 또한 그와 유사한 작업으로 읽힐 수 있다. 후자는 즉 상속된 코드들이 이미지나 내러티브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관객이 어떤 위치를 점하도록 할지 미리 정하기를 그만두는 바로 그 순간이다.
저항으로서의 제작
영화감독이 되기 전 포르타베야는 스페인 영화 모더니티의 근간을 이루는 세 작품을 제작한 프로듀서였다. 그는 자신의 제작사인 ‘Films 59’를 통해 카를로스 사우라의 〈불량배들〉(1959), 마르코 페레리의 〈휠체어〉(1960),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1961)를 탄생시켰으며 이 작업을 독재 정권 세계관을 떠받치는 기반 구조, 즉 체제의 미디어 장치 내부에 개입하는 행위로 수행했다. “가장 큰 저항은 1960년대에 그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선언이었다.”6 그는 이어 설명한다. “세 영화에 참여한 것은 윤리적 책무 때문이었다. 나는 그 활동을 정치적 실천과 분리하지 않는다.”7 그것은 형식적 도전을 내포한 일련의 실천이었으며 포르타베야는 “새로운 생산 방식과 이미지의 새로운 형태학, 해방된 제작법, 새로운 공기, 시선의 변화”8를 탐구하고자 했다.

〈비리디아나〉의 운명은 그에 따른 교훈을 압축해 보여 준다. 칸으로 비밀리에 반출되어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영화는 국제적인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며 독재 정권의 이중 잣대를 폭로했다. 바티칸 기관지 『L’Osservatore Romano』는 이 영화에 대해 “신성 모독적”이라고 썼고 이는 프랑코 체제의 정합성에 타격을 입혔다. 고발이 이어진 뒤 독재 정권은 “그 영화를 사라지게 했다. (······) 그들은 영화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삭제해 버렸다”.9 〈비리디아나〉와 스페인을 연결하는 모든 흔적을 제거하고 권리를 멕시코 투자자에게 넘겨 버린 것이다. 금지하는 것과 삭제해 버리는 것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금지는 억압하는 대상을 적어도 인정은 한다. 반면 삭제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조건 자체를 철회한다. 권위주의 정권은 내용을 검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이미지나 기억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는지에 관한 영역 자체를 통제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미셸 푸코는 비판을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성찰적 불순종의 기술”10로 정의했다. 비판은 달리 말해 권력, 진리, 복종을 하나로 엮는 체제들에 맞서 종속에서 벗어나는 실천이다. 포르타베야는 프로듀서 시절부터 이미 그러한 실천을 수행하고 있었다.
〈호안 미로, 타인들〉과 〈뱀파이어〉: 사보타주로서의 전위적 제스처
1960년대 말, 포르타베야는 개입 영역을 확장하기로 결심한다. 감독으로서 활동을 개시한 그의 불순종은 영화적 저항의 핵심 사례라 할 만한 다음의 두 작품에서 각기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다.
〈호안 미로, 타인들〉(1969)에서 그는 호안 미로가 카탈루냐건축가협회 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과정을 촬영한다. 이 벽화 전시는 프랑코 정권이 미로를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던 공식 전시에 대한 일종의 대항적 기념비로 기획된 것이었다. 경건한 기록물이 될 수도 있었던 영화는 정반대로 나아가 미로와 포르타베야의 전복적인 공모가 된다. 전시가 끝난 뒤 미로는 벽화를 직접 지워 버리고 그 행위는 영화의 일부가 된다. 이로써 이 영화적 재료는 하나의 제스처 안에 창조와 파괴를 동시에 담아낸다. 이는 전유에 대항해 구상된 행위의 두 얼굴로, 예술의 제도적 이용에 맞서고 예술의 영속성을 상징 자본으로 페티시화하는 데 맞서며 예술의 상품화에 맞서고 또한 어떠한 정치적 귀속에도 맞선다. 이때 영화적 형식은 모든 종류의 숭배를 미리 방지하고자 구상부터 실현에 이르기까지 탈신비화를 사유한다. 특히 카를레스 산토스가 작업한 사운드트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관객이 어떤 애착도 느끼지 못하도록” 하며 “전체 과정이 다소 견디기 힘들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졌다.11 여기서 형식은 모티프를 보조하지 않으며 오히려 낯설게 한다. 영화는 벽화 작품을 기념비로 만들어 버렸을 회로에서 그것을 빼내어 행위가 일어나는 시간 속으로 되돌려 놓는다. 사보타주이자 성찰인 형식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편 〈뱀파이어〉(1970)는 장르 영화 산업 내부에서 작동하며 또 다른 방식의 개입을 전개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화적 환상에 대한 영화적 해체이다. 헤수스 프랑코의 〈드라큘라 백작〉(1970) 세트장에서 기생하는 방식으로 촬영되었으며 크리스토퍼 리가 주연을 맡은 〈뱀파이어〉에서 포르타베야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영화적 스펙터클이 지닌 암시의 힘”12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그의 목적은 “영화적 언어를 성찰하려는 시도”, 곧 “하나의 담론에 대한 담론”13을 수행하는 데 있다. 그것은 “이윤 창출과 주의 분산”14 외에 아무런 목적이 없기에 그가 “예술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낡고 거세된” 것으로 간주한 영화들의 가면을 벗겨 내는 작업이다. 이는 곧 영화의 기만적인 장치들을 뽑아 꺼내 놓는 일종의 흡혈 행위다.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세운 판지 벽, 스크린의 불투명성 뒤에 숨겨진 기술 노동, 사유를 위한 원자재로 변모한 인공 피까지. 이러한 해체는 안락한 위치에서 이뤄지지 않으며 비판적 입장에서 스스로 받아들인 주변성, 다시 말해 독재 체제가 부여한 여러 조건이 스며 있는 영화적 장치에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자각에서 비롯한다. 여기에는 포르타베야 영화의 핵심적 특징이 응축되어 있다. 그의 영화는 맥락에 등을 돌린 채 만들어지지 않으며 단순히 그 맥락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맥락이 품은 긴장과 갈등에 깊이 연루되어 그것들을 흡수한 뒤 형식으로 변형해 되돌려 준다.

또 다른 비판적 지평에서 보면, 포르타베야의 작품 세계는 지배적인 영화의 ‘쾌락 경제’를 공격해야 한다는 로라 멀비의 요구와 공명한다. 이는 새로운 만족감을 창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서사적 극영화가 주는 안락함과 충만함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위함이다.15 〈뱀파이어〉는 영화라는 매체의 물질성 자체를 대상으로 한 작업이다. 사운드 네거티브를 활용해 이미지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그 결과 흑과 백이 양극단이 되어 충돌하면서 이분법적 질감을 형성한다. 여기에 카를로스 산토스가 삽화적 기능에 머무는 음악을 폐위하고 자율적인 행위로서의 사운드를 남겨 둔 사운드트랙을 더해 효과가 배가된다. 포르타베야의 뱀파이어적 빨아들임은 매혹을 통해 낯설게 보는 경험, 즉 영화적 물질성의 한계를 목격하는 경험을 유발한다. 이러한 제스처는 예술의 낯설게하기 기능에 관한 빅토르 시클롭스키의 논의16에 비추어 읽어 볼 수 있는데, 사물을 알려진 대로가 아니라 실제로 지각되는 대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회복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비판적 기생성parasitism은 모든 허구가 만들어 내는 환영성뿐 아니라 독재 체제가 주장하는 자명성 역시 낯설게 만든다. 독재 정권은 하나의 인공물이며 기호들의 조립체이고 공포, 환상, 복종을 합리적으로 생산하는 체계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찬〉과 〈이사〉: 비가시화된 것을 등장시키기
〈뱀파이어〉가 내부에서부터 꿈을 해체한다면 〈만찬〉(1974–2018)은 그 꿈을 뒤로하고 떠나 공동 공간을 구축한다. 포르타베야는 최소한의 스태프만 동원해 비밀리에 다섯 명의 전직 정치범을 한 식탁에 불러 모은다. 촬영은 살바도르 푸지 안티크가 처형되던 바로 그 밤에 이뤄진다. 다섯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영화에는 대본도 극화도 없으며 대신 감옥, 단식 투쟁, 자유에 관한 대화가 있을 뿐이다. 포르타베야가 말했듯 “이 영화는 정치범이 처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접근하고자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모든 참여자는 주제뿐 아니라 전략 자체에도 함께 개입”한다.17

〈만찬〉은 정치범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며 실제 진행 중인 잔혹한 탄압 아래 만들어진 영화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 영화 특유의 윤리적 긴장, 그리고 중요한 형식적 선택인 ‘절제’가 비롯한다. 포르타베야는 고통을 극화하지도 않고 참여자들을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으며 희생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서사시를 들이밀지도 않는다. 그가 담아내는 것은 저녁 식사, 목소리, 침묵, 그리고 정치적 신념 때문에 폭력을 겪어야 했던 몸들의 지속성이다. 영화의 힘은 바로 그러한 집중에서 나온다. 말 자체를 신뢰하는 절제된 형식은 일종의 해방 행위가 된다. 이는 식탁을 둘러싼 집회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형식이며, 바로 그 구성 행위를 통해 미래의 모든 시선이 그 집회를 지각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정치적 자유로 이해했던 것과 유사한 무언가가 출현한다. 바로 억압에서 해방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적 영역에 참여함으로써 실현되는 자유다.18 또한 이 모임은 주디스 버틀러가 사유한 ‘수행적 집회performative assembly’ 개념과도 공명한다. 정치적인 것의 분배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살 만한 삶의 조건을 요구하는 몸들의 모임인 것이다.19 그러나 〈만찬〉의 모임은 공적 공간에서 이뤄지지 않는데, 독재 정권하에 길 위에서의 집회 촬영은 정치적 행위로 간주되어 금지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회는 비밀스러운 저녁 식사 자리라는 불안정하고 취약한 공간에서 이뤄지고 바로 그렇기에 영화는 결정적인 기능을 획득한다. 집단적 발화가 다시 가능해지는 공간을 열어젖히며, 그 안에서 미래의 삶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반면 〈이사〉는 대사 없이 작동한다. 이 작품은 스위스의 예술사가이자 큐레이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프랑코 세력에 의해 처형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생가 박물관에서 진행된 일련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포르타베야는 집 안의 모든 물건을 비워 내자고 제안한다. “관람객이 의미와 울림으로 가득한 공간들을 아무 방해 없이 거닐게 하기 위해”, 또 “시인의 정서적·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부재를 더 선명히 하고 가까이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다.20 영화에서 로르카는 재현되지 않는다. 그는 균열이자 우리를 호출하는 역사적 힘으로 등장한다. 포르타베야가 말했듯 “영화에서 의미 있는 부재는 언제나 프레임 밖으로부터 강력한 존재감을 획득한다. 집의 비어 있음은 페티시적 개입 없이 시인에 의해 채워진다”.21 여기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사유가 이 작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상상력 없는 이미지는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이미지들은 시간의 시각적 흔적으로서 “실재에 닿을 수 있으며” 실재를 타오르게 할 수 있다.22 영화 속 비어 있는 집은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이 통제되지 않은 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조건이다. 비워 내는 행위 역시 정밀한 정치적 형식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묻혀 있던 폭력의 실재를 길들이거나 망각 혹은 단순한 재현으로 무력화하지 않으면서 다시 감각되도록 한다.

형식, 자유, 시선: 현재의 윤리
포르타베야의 전 작업을 관통하는 것, 즉 카를로스 사우라의 〈불량배들〉부터 마지막 연출작 〈제너럴 리포트 II〉(2015)까지 이어지는 것은 이념도 스타일도 아니다. 바로 자유란 어떤 속성도 선언도 아니라 시선이 실행되는 한 방식이라는 확신이다. 영화의 정치는 주제가 아니라 언어로 결정되는데, 언어는 시선을 조직하고 시선은 세상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포르타베야가 말했듯 “정전적 규범을 새로운 서사 논리로 해체하는 언어의 적절성이 없다면, 의도가 아무리 훌륭하대도 내용의 의미와 형식의 의미 사이에 분열이 발생한다”.23 그렇기에 그는 관객을 철저히 신뢰한다. 미디어에 포획된 관음증적 시선과 상업 영화의 가부장적 교수법에 맞서 포르타베야는 관객을 정치적 주체로, 즉 스스로 보고 비교하고 의심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하는 형식을 구축한다. 그의 영화는 관객에게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를 읽어 낼 코드들을 되돌려 준다. 이는 벨 훅스가 백인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구조가 생산한 이미지들에 맞서는 흑인 저항의 구체적인 실천이라는 맥락에서 ‘대항적 시선oppositional gaze’이라 명명한 것과 유사한 비판적 자원이다. 그것은 곧 시선이 자신을 가두려 했던 체제에 더는 복종하지 않는 순간 시작되는 자유다. 검열이나 금지뿐 아니라 과잉 생산, 참여, 그리고 자기 노출의 강박으로 끊임없이 주의력을 빼앗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장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역량이 정치적 전략 면에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포르타베야의 영화가 거는 내기이다. 우리 중 누구도 감각적인 것의 분배 바깥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무엇을 바라보는 그 어떤 행위도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 형식이 자유와 복종 사이 경계선인 지점에서 포르타베야는 여전히 동시대인으로 남아 있다. 그의 영화는 세계가 어떠한지 말해 주지 않는다. 대신 세계를 바라볼 가능성과 의무를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안에서, 그러한 복원은 계속해서 사유되고 활성화되어야 할 다른 모든 정치적 행위의 조건이 된다.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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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어와 카탈루냐어로 된 모든 인용문은 필자가 직접 번역했다. ↩
- Portabella (2024), Impugnar las normas, p. 458. ↩
- Ibid., p. 17. ↩
- Ibid., p. 22. ↩
- Rancière (2004), The Politics of Aesthetics, p. 7. ↩
- Portabella, in Leal (2021), “O caçador de vampiros.” ↩
- Portabella, in Amela (2005), “Soy radical, pero no sectario.” ↩
- Portabella, in Altaió (2011), “En la creativitat, la manipulació s’ha de reivindicar.” ↩
- Portabella (2024), op. cit., p. 458. ↩
- Foucault (2024), What Is Critique? p. 26. ↩
- Portabella, in Diestro-Dópido (2011), “Pere Portabella from Buñuel to Lorca.” ↩
- Portabella & Brossa (1970), Vampir, synopsis. ↩
- Portabella (2024), op. cit., p. 156. ↩
- Portabella & Brossa (1970), op. cit. ↩
- Mulvey (1975),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p. 8. ↩
- Shklovsky (1965), The Art as Technique, p. 12. ↩
- Portabella (2024), op. cit., p. 177. ↩
- Arendt (1990), On Revolution, p. 32. ↩
- Butler, Notes Toward a Performative Theory of Assembly, p. 21. ↩
- Portabella (2024), op. cit., p. 477. ↩
- Portabella, in Taylor (2009), “Mudanza.” ↩
- Didi-Huberman, Cuando las imágenes tocan lo real, p. 35. (trans. by author). ↩
- Portabella (2024), op. cit., p. 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