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남성 우월주의에 따라 구성된 사회, 흑인·원주민·유색 인종BIPOC을 폄하하고 욕보이게끔 설계된 사회보다 더 그로테스크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있을까? 그것을 폭로하고 마주할 방법은 오직 극단적인 부조리함일지도 모른다. 선구자적 감독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의 손에서 극단적 부조리는 1960년대 미국의 백인 이성애자 남성성과 권력 문제를 재정의하는 영화적 방법론이 된다. 그는 독보적인 유머 연출 방식을 통해 의도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제작하여 주류 영화로부터 떨어진 공간을 만들어 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다우니가 만든 과장된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는 엄숙한 비평이나 진지한 서사극이 아니라 넘쳐나는 슬랩스틱, 풍자, 혼란을 통해 인종, 권력, 남성성에 맞선다.
이 글은 두 장편영화 〈퍼트니 스워프〉와 〈그리저의 궁전〉을 미국 인종사의 맥락에서 검토하고, 이들 영화 속 영웅적이지도 허약하지도 않은 백인 남성성이 극단적 부조리를 통해 권력 구조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는 방식을 살핀다. 이는 당시로서 도발적 전략이었고, 그중 일부는 2026년에도 영화적 양상으로 유효하다.
당시는 인종과 젠더 문제에 있어 미국 역사상 최대 격동의 시기 중 하나였다. 〈퍼트니 스워프〉와 〈그리저의 궁전〉은 이러한 배경에서 부조리한 코미디로 정치와 권력을 다룬, 통찰적인 영화 한 쌍이다. 두 영화 속 유머는 그로테스크와 우스꽝스러움으로 세계관을 채운다. 인종이나 퀴어함을 학술적 맥락에서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일으킬 수 있는 오늘날, 이들 영화의 불경함은 특이한 해방감을 주며 여전히 급진적이다. 여기에 차분한 드라마 같은 것은 없다. 대신 도발과 슬랩스틱 즉흥 코미디가 인종, 계급, 젠더의 권력 구조를 조명한다.
다우니는 1960년대 초 데뷔하여 저예산 실험 단편영화를 만들며 불경한 감독으로 평판을 쌓았고, 〈퍼트니 스워프〉로 이 평판을 확고히 했다. 다우니는 유일한 대규모 예산 작품인 〈그리저의 궁전〉에서 초기의 비전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껏 펼쳐 보였다. 비록 유명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버지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다우니의 영화는 미국 독립 영화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다우니를 잭 스미스나 캐롤리 슈니먼 등 퀴어 및 페미니스트 감독들과 같은 의미에서 ‘아방가르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작품은 영화적이고 정치적인 경계선을 넘나든다. 많은 동시대 예술가가 (베트남 반전 시위나 민권 운동 등) 직접 행동을 통해 정치적 참여를 실천했다면 다우니는 에둘러서, 지저분하게, 그리고 종종 불쾌한 방식으로 개입했다. 그런 의미에서 다우니의 작품은 정치와 발화에 관한 고유한 관점을 선보이는, 진정한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다.
〈퍼트니 스워프〉의 주인공 퍼트니 스워프(아널드 존슨 분)는 매디슨 애비뉴에 자리 잡은 광고 대행사 이사진 중 유일한 흑인이다. 스워프는 갑작스레 사망한 회장의 후계자로 선출되는데,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백인 동료들이 저마다 다른 누구도 스워프를 지지하지는 않으리라 짐작하며 그에게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권력은 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적이라 믿는 백인 남성들의 부조리한 계산 착오를 통해 이양된다. 이런 도입부는 다우니의 풍자 방식을 잘 드러낸다.
회장이 된 스워프는 경영진을 해고한 뒤 그 자리에 젊은 흑인 급진주의자들을 임명하고 회사 이름을 ‘트루스 앤드 솔Truth and Soul’로 변경한다. 영화는 미국의 자본주의, 광고 산업, 인종 정치를 패러디한다. 일부 내용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여전히 매운맛 유머를 선보이며 인종과 젠더에 관한 접근 역시 관습을 뛰어넘는다. 한 가지 문제적인 측면은 흑인 주인공의 목소리를 다우니가 더빙한 점으로, 이는 인종과 재현에 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퍼트니 스워프〉가 도시를 배경으로 한 풍자물이라면 그것의 사막 속 환각 버전에 해당하는 〈그리저의 궁전〉에는 퀴어 난쟁이, 게이 아들,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스도를 연상케 하는 치유자가 등장한다. 영화는 서부를 배경으로 제시(앨런 아버스 분)의 여정을 따라간다. 주트 슈트(상의 어깨와 바지통이 넓은 남성복)를 입은 이 떠돌이는 하늘에서 내려와 기적을 행하고, 죽은 자를 되살리며, 끝내는 십자가에 매달린다. 불편할 정도의 폭력, 슬랩스틱 코미디, 신성 모독을 뒤섞은 줄거리는 의도적으로 갈피를 잡기 어렵게 진행된다.
두 영화를 연결하는 것은 유머뿐 아니라, 영화적 핵심 도구로 부조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우니는 현실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현실을 뒤틀어 자극적인 유머를 선사하고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로 점철된 세상의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때로 이런 접근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 불편을 만든다. 영화에 활용된 캐리커처, 주변화된 신체를 희극적 요소로 등장시킨 점, 인종과 젠더에 관한 접근의 불균형 등은 다우니의 급진주의를 쉬이 지지하기 어렵게 한다. 어떤 요소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부적절한가 하면, 또 다른 요소들은 불가피하게 불편을 초래한다. 그럼에도 대상을 고립시키는 유머와 모두를 연루시키는 유머에는 차이가 있고 다우니의 영화는 대개 후자를 추구한다. 매번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다우니에게 부조리는 정치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정치로 진입하는 수단이다. 상황을 극단으로 밀어붙임으로써 그는 마치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한 것처럼 제시되는 체계의 토대가 사실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중역 회의실에서건 사막 마을에서건, 권위는 끊임없이 행사되고 도전받고 재구성된다. 질서를 강요하거나 파괴하기 위해 무리 지어 움직이는 남성들은 완전히 지배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은 허약한 남성성을 상징한다. 문제는 단지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가 아니라, 권력 자체가 어떻게 수행되고 유지되고 웃음거리가 되는지다.
여기서 드러나는 권력상은 어디에나 뻗치는 만연성과 불안정성을 함께 갖는다.
두 가지 진실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세 가지, 네 가지도. 〈퍼트니 스워프〉는 인종과 자본주의에 대한 획기적인 풍자인 동시에, 백인 영화감독의 어정쩡한 인종주의 재현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재현에 대해 불편한 의문을 제기하는 영화일 수 있다. 〈그리저의 궁전〉은 종교 서사와 웨스턴에 대한 과감한 재창조인 동시에, (특히 성에 관해) 깔끔하지 못한 도발과 패러디의 잡탕이기도 하며,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도발적인 언더그라운드 영화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이들 영화를 마주하는 것은 곧 부조리를 통해 권력 구조를 다루고자 했던 시도의 모순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다우니의 영화적 접근은 불편하고 부조리한 충돌을 통해 백인 남성 우월주의에 관한 긴장과 해소를 만들어 낸다.
번역: 고아침

퍼트니 스워프Putney Swope
감독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Robert DOWNEY Sr. | United States | 1969 | 86 min | Fiction | 특별전: 뉴욕 언더그라운드—더 매버릭스Special Focus: New York Underground—The Mavericks

그리저의 궁전Greaser’s Palace
감독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Robert DOWNEY Sr. | United States | 1972 | 91 min | Fiction | 특별전: 뉴욕 언더그라운드—더 매버릭스Special Focus: New York Underground—The Maverick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