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1980년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일의적이거나 절대적인 답변이 불가한, 그러나 한국 영화의 역사를 움직이는 동기인 이 물음에 대답하려 애쓴 감독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안성기를 떠올렸다. 이장호와 배창호가 〈바람 불어 좋은 날〉(1980)과 〈꼬방 동네 사람들〉(1982)로 ‘한국 + 영화’에 민중의 로브로low-brow한 감수성과 몸짓을 도입하며 ‘1980년대’를 열 때도, 박광수와 이명세 그리고 장선우가 〈칠수와 만수〉(1988), 〈개그맨〉(1988), 〈성공시대〉(1988)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1980년대’를 계승하고 심화하여 ‘1990년대’의 문을 두드릴 때도, 그 중심에는 안성기가 있다. 마치 한국 영화란 결국 안성기라는 듯, 혹은 안성기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 영화가 거듭날 수 없다는 듯이.

 

거론한 귓돌들을 차치하더라도—영화 팬을 넘어—한국인 일반에게 안성기는 결연한 민초, 억눌린 샐러리맨, 이상한 야심가, 간절한 승려, 필요한 광인, 순수한 애처가, 편집증적 변태, 냉소적인 형사, 잔악한 살인범······ 혹은 결연함, 억눌림, 이상함, 간절함, 순수함, 편집증, 냉소, 잔악함······의 얼굴이었다. 기나긴 시간과 드넓은 폭, 그러므로 안성기에 관해 쓰는 건 흔한 배우론의 범위를 훌쩍 넘는다. 이미지를 점유하는 스타로서든 기능을 가능케 하는 연기자로서든, 어떤 접근도 60년의 시간, 170편의 작품에 출연한 ‘안성기(들)’을 붙잡지 못한다. 그러므로 안성기에 관해 말하다 보면 기어코 한국 영화의 전부를 말할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별세한 그를 추념한 다른 평론가들의 말처럼, 안성기는 “한국 영화의 내력벽”(이보라) 혹은 “한국 영화의 집”(조일남)에 가까웠다.

 

임상수: 제가 도제를 했을 무렵, 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영화계는 완벽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어요. 심지어는 신상옥 감독이 돌아가셨을 때 지금 우리가 누구누구라고 할 수 있는, 제 세대의 젊은 감독들부터 아무도 그 빈소에 나타나지 않아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안성기 씨가 자기가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했는데,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라는 식의 발언까지 한 적이 있을 정도로······. 

— 지승호, 『영화, 감독을 말하다』(수다, 2007) 중에서

 

스크린 바깥에서도 안성기는 그 역할을 했다. 지탱하고 내어 주기. 한국 영화의 굵직한 사건마다 행정적인 역할과 얼굴을 도맡고, 유현목과 이장호의 말년 범작에도 서슴없이 출연했으며, 규모가 작은 독립 영화에도 출연을 마다하지 않았거니와 현장에서는 신예 배우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러니 분명 ‘방화(邦畫)’ 시대와의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는 그 책임을 짊어졌다. 그 책임감이 무겁거나 내심 피곤하지는 않았을까. 지극히 사감일 터이나, 그의 경력을 알지 못할 때조차 나는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나오는 안성기가 피로해 보이곤 했다. 소소하게 밈이 된 “박스 치워!”를 “박수 쳐!”로 잘못 듣는 〈7광구〉(2011)가 한국인만이 내통할 수 있는 코드를 블록버스터 규모에 억지로 넣으려는 데서 발생한 우스꽝스러운 희비극이듯,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이렇게 모종의 조급함과 엉성함으로 기억될 장르에서 갈피를 못 잡은 배우들이 상황 전달에 급급해하며 눈을 부라리거나 얼굴을 잔뜩 구기며 인공적인 연기를 한다. 다만 안성기만 평소의 안성기로—누군가가 보기에는 연기를 ‘안’ 하는—곁에 있다. 현란함과 인공성이 자아내는 불화(不和)에 불화하며, 그 곁에서 마치 버티어 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응당 함께해야 할 ‘국민 배우’의 그 모습은 어딘가 지친 기색으로 기억되었다.

 

그 반대급부일까, 혹은 안성기의 너무 이른 별세 때문일까? 한국 영화에 안성기가 더는 없다는, 흡사 형용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역력한 미완의 상황에서, 내가 자꾸만 떠올리는 안성기는 몸부림도 없이 편안히 잠들어 있다. 영화에서 누군가 자는 장면은—그것이 하나의 시험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면—대개 금방 지나간다. 자는 장면만으로는 좀체 사건을 진행시킬 수가 없으니, 곧 꿈을 꾸거나 깨거나 혹은 누군가 그 틈에 몰래 침입한다. 다만 곧 깨거나 다른 사람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예비하는 경우일지라도 안성기의 잠은 유독 푸근하다. 〈남자는 괴로워〉(1995)에서 잠에 든 안성기가 의자와 함께 날아오르는 장면, 그리고 〈페어 러브〉(2009)에서 선잠에 든 틈에 연인이 안성기를 방문하는 장면에는 어딘가 오묘하게 느긋한 구석이 있다. 그 오묘한 느긋함이란, 일평생을 ‘국민 배우’로 지냈던 사람이 ‘연기’란 것을 거의 투명할 정도로 적게 할 때만 자아낼 수 있는 감흥 같다. 그의 별세 이후에야 느낄 수 있었던 책임과 피로, 그리고 잠의 문제를 이국(異國)의 감독인 오구라 고헤이는 일찍 간파해서 〈잠자는 남자〉(1996)를 만들었던 건 아닐까? 죽음은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한다. 그런데 영화film란 복된 발명품은 단지 모습뿐만 아니라 소리까지 그대로 보존하는 터라, 영화에 담긴 사람은 그것이 상영될 때마다 깜빡깜빡 현존할 수 있다. 마치 그가 없는 게 아니라 잠에 들었던 것처럼. 혹은 죽음 후에도 우리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건네어 주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처럼(〈남자는 괴로워〉).

 

다소 이기적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안성기 영화로 끝을 맺고 싶다.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안성기의 영화로 기억되지만, 실상 이 영화에서 가장 반짝이는 건 혜린(황신혜)이다. 영민(안성기)은 한때 사랑했지만 미국으로 떠난 혜린을 오랜만에 만난다. 혜린은 배우로 실패조차 하지 못했다. 혜린은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한 번 봤을 뿐 갖은 일을 하며 그저 생존했을 뿐이다. 한때 넘볼 수 없었던 여성이 실패를 겪고 성공한 나에게 온다는 속된 판타지가 〈기쁜 우리 젊은 날〉에는 분명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쁜 우리 젊은 날〉은 결코 그런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귀국한 혜린은 줄곧 고개를 내리깔고 있다. 실패를 곱씹는 듯. 태양이든 형광등이든 가로등이든 빛은 대개 위에 있는 터라 고개를 내리깐다는 것은 빛이 눈에 닿지 않는다는 것이고 혜린은 자연스레 안광을 잃는다.

 

그런데 영화의 한 장면, 혜린이 미국에서 배우 생활에 성공했고 한국에는 잠깐 짬을 내어 온 것이라 거짓말-연기를 할 때,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 안광을 되찾는다. 그 순간 혜린은 판타지에서의 대상이라는 위치를 훌쩍 넘는다. 혜린의 눈 너머로 미국에서의 갖은 삶이 기록되었겠지만, 고개를 들 때 저 눈의 반짝임에는 그녀의 연기에 대한 기쁨과 재능이 반짝 충일한다. 그리고 저 평범한 순간이 그토록 아름답게 비치는 건, 우리가 저 모습을 영민을 통해 보기 때문이다. 당신을 통해 유출하는 빛을 누구보다 내가 정확히 보겠다는 결심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영민은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영화 곳곳에 배치된 영민의 시점 숏은 이런 주제를 자의식화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 혜린은 연극에서 이런 대사를 읊는다. “그대가 생명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지 않겠소. 생명은 한숨과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대가 영혼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겠소. 왜냐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니까.”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이렇게 영원한 사랑을 ‘보는’ 사람의 영화다. 영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사랑한 배우가 안성기였다. 영혼에 대한 사랑은 영원할 터이고, 그 사랑을 하는 사람도 함께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