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필립 소트니첸코 Philip SOTNYCHENKO | Ukraine | 2023 | 101min | Fiction | 국제경쟁
〈팔리시아다〉에 매혹을 느낄 관객들이 탐문하게 되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시간 구조를 설계한 스토리텔링의 비밀이다.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바꾼 서사의 미로는 들쭉날쭉한 오솔길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두 파트로 느슨하게 이어지는 플롯은 다소간 혼란스럽다. 첫 번째 파트는 20분간 지속하며 스토리 시간상 현재에 해당한다. 첫 파트에서 청년 키릴은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연인 아이셀의 전시회로 향하는 기차를 놓친다. 키릴을 포함한 일군의 청년들은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관심사에 대해 토론하고, 아이셀 가족의 단란한 저녁 식사에서는 화합의 대화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날카롭게 대립하던 커플의 파국으로 첫 파트가 종료된다. 두 번째 파트는 이전 장면에서 깨어난 일곱 살 소년 키릴의 기억을 상연한다. 캐릭터의 눈을 통한 기억처럼 묘사되는 이 파트는 1996년으로 시간을 이동하여 법의학 의사를 포함한 두 명의 경찰 수사관이 고위 경찰 관료를 살해한 범인을 쫓는 과정을 묘사한다. 한 사람은 아이셀의 아버지인 경찰 수사관 일하르(나브루즈 파샤예우)이고, 다른 이는 법의학자 올렉산드르(안드리 주르바)이다. 이 파트의 도입부는 범죄학자의 비디오 녹화 장면들로 채워지며 이후에는 수사 목적으로 녹화되는 장면들이 제시된다. 나뉜 두 챕터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왜 나란히 표시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두 주제 사이의 광범위한 상관관계에 주목했을 때 서사 정보의 세부 요소들은 새로운 의미로 살아난다.
비정통적이고 모호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팔리시아다〉의 플롯은 1996년과 현재를 공명하는 사건, 상황, 캐릭터들을 흐릿하게 잇는다. 필립 소트니첸코 감독은 복고풍 탐정 장르의 맥락 안에 복잡한 플롯을 능숙하게 조형하는데, 스토리 작법도 흥미롭지만 영화의 백미는 촬영과 편집의 세심함이다. 영화적 언어가 말뿐 아니라 시청각 언어로 번안되는 방식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는 감독 소트니첸코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혼합하여 폭넓은 영화적 경험을 창출하고 모든 프레임을 계산적으로 연출하여 의미와 스타일의 합일을 보여준다. 오래된 비디오처럼 보이는 룩을 얻어내기 위한 촬영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아카이브에서 뽑아낸 빛바랜 홈 무비 같은 효과를 창조한다. 수사와 감식, 현장검증을 기록하는 롱 숏과 롱테이크로 일관하는 카메라 설정으로 인해 우리는 겹쳐진 프레임 안에서 무한히 중복되는 시간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와 같은 스타일 효과는 원어 제목인 ‘라 팔리시아다(La Palisiada)’의 의미와도 포개진다. 이 심리학 용어는 ‘명백한 진실을 반복하여 말하다(speech redundancy)’는 속뜻을 가지고 있다. ‘반복’은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시되는 이 영화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두 챕터에는 일치하지 않지만 거듭 말해지는 반복의 요소가 많은데, 가족 식사와 토론, 르네상스 회화의 이름들, 커플의 다툼, 총성으로 마무리되는 결말, 창문 밖의 카메라가 실내로 진입하는 숏 따위를 들 수 있다.
〈팔리시아다〉는 교묘한 이야기이지만 많은 이슈를 담은 이야기는 아니다. 교란적인 구조 안에는 상호 관련성하에 놓인 시간의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며 확실히 이해했다고 생각한 후에도 또 다른 층위에서 영화가 우리를 놀라게 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이것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대한 우화이고 무너진 제국의 위험한 잔해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에 관한 영화이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과잉 해석보다는 불쑥 튀어나오는 반복의 요소들에 주목하는 것이 관람의 즐거움을 준다. 사라지지 않는 역사의 유산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는 과거가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를 거쳐 자녀에게 스며든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닫게 한다. 범죄를 재현하는 장면을 촬영하든, 경찰 수사관 일하르와 어린 딸 아이셀의 전화 통화를 촬영하든 카메라 양식의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범죄 비디오를 찍는 촬영자가 만든 영화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현재 진행형의 또 다른 범죄라는 것을 암시한다. 범죄를 기록하는 주체와 과정이 곧 범죄가 되는 범죄 이야기, 프레임 안 프레임에서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경찰국가의 망령에 유린당하는 인간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