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지난 10년 동안 전주국제영화제에 아홉 번 방문했다. 코로나 시기의 한 해를 제외하면 매년 영화제를 찾았으니, 내게 전주는 거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셈이다. 여러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의 거리를 배회하던 제임스 베닝, 심야 상영으로 〈라 플로르〉를 완주하고 극장을 나와 맞은 아침, 영화 상영 도중 “이딴 것도 영화냐!”라고 호통을 치며 나가던 중년의 관객, 영화제에서 마련한 포럼의 단상에 올라 팔 굽혀 펴기를 하던 친구······.

 

하지만 매해 전주를 방문하는 목적은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그곳에 영화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맛집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요즘에는 주로 그곳에 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간다. 간혹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 자체에 대한 흥분은 조금씩 줄었다. 아마도 굳이 그 영화들을 영화제에서 보지 않더라도, 가까운 미래에 현실의 극장에서든 해적질의 바다에서든 결국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까닭이 클 것이다. 시간표를 오밀조밀 테트리스 하듯 짜고, 최대한 많은 영화를 보겠답시고 엔딩 크레디트 도중 빠져나가는 최적화된 동선까지 계산하며 하루 네 편에서 여섯 편의 영화를 욱여넣던 시절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영작이 공개되는 날은 여전히 1년 중 가장 도파민이 터지는 날 가운데 하나다. 누구의 신작이 없어서 아쉽군. 이 영화의 복원판을 틀어준다고? 올해 특별전은 왜 하필 이 사람이지? 이 영화는 보고 싶군, 별로 보고 싶지 않군······. 이런 크고 작은 가치 판단을 하며 상영작 목록을 훑는다.

 

영화제라는 축제의 사회적 기능에 관해 내가 덧붙일 말은 많지 않다. 나는 대체로 영화를 보러 영화제에 가는 관객이고, 따라서 영화제의 역할 역시 조금 단순하고 기능적으로 고찰하는 편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고, 아직 알지 못했던 영화를 보고 싶게 하는 곳. 그렇다면 상영작 목록을 훑는 즐거움은 좋은 영화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서만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왜 이 영화를 골랐으며, 왜 다른 영화들과 함께 이 자리에 놓았는지를 짐작하는 일 역시 그 즐거움의 일부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 전주의 프로그램을 보며 자주 느끼는 아쉬움은, 상영되는 영화들보다는 그것들을 고르고 배열하는 판단이 다소 흐릿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시네필전주’는 시네필적인 관점을 보여 주는 프로그램인가, 아니면 시네필이 좋아할 법한 영화들을 모아 놓은 섹션인가.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권희수의 실험 영화 〈임계〉가 ‘영화보다 낯선’이 아니라 ‘코리안시네마’ 섹션에서 세 편의 극영화와 함께 상영되었던 일이 우선 떠오른다. 실험 영화를 반드시 실험 영화 섹션에 가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임계〉를 동시대 한국 영화의 한복판에 놓는 일은 흥미로운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적어도 이 영화가 함께 상영되는 다른 한국 영화들과 어떤 몽타주를 이루는지, 그 배치를 통해 무엇이 새롭게 보이게 되는지를 프로그램 자체가 보여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본 것은 경계를 과감하게 허문 배치라기보다 왜 그 자리에 놓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고립에 가까웠다.

 

최근 전주의 스페셜 프로그램에 좀처럼 기대가 생기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해외 아카이브나 비평가, 큐레이터와 협업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에이드리언 마틴이나 헤이든 게스트가 고른 영화를 전주에서 보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내가 궁금한 것은 그들이 어떤 영화를 선택했는지가 아니라, 전주가 왜 그들의 선택을 지금 이곳으로 가져왔는가이다. 외부 큐레이터가 완성한 작은 프로그램이 전주가 그리는 더 큰 지도 안에서 하나의 재료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협업이다. 반대로 외부에서 완성된 프로그램들이 별다른 관계 없이 나란히 놓인다면, 영화제는 자신의 판단을 점차 외주화하게 된다.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는 그 외주화가 가장 가벼운 방식으로 드러나는 섹션이다. 유명 영화인이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를 고르고 영화제는 그 취향을 하나의 특별전으로 만든다. 유명인이 고른 오래된 명작을 다시 보는 일이 반드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를 ‘프로그래밍’이라고 부를 때는 조금 머쓱해진다. 오랜 시간 영화를 조사하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경향을 찾아내고, 작품들 사이의 관계를 설계하는 노동이 유명인의 추천 목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의 권위를 대중에게 개방한다기보다 프로그래밍이라는 일을 취향 공개 이벤트 정도로 가볍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프로그래밍이 유명인의 추천 목록과 다른 일이라면, 그 차이는 결국 선택을 지속적인 관점으로 만들어 가는 데 있을 것이다. 한때 『씨네21』에는 ‘시네마나우’라는 지면이 있었다. 부산의 김지석과 전주의 유운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동시대 영화의 움직임과 중요한 작가들을 소개했다. 두 사람이 그린 지도는 서로 달랐겠지만 적어도 관객은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으며 어디에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어느 날 갑자기 발표된 영화 목록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찰과 판단의 결과였다.

 

요즘 영화제에는 영화를 고르는 사람은 있지만 그 선택을 통해 동시대 영화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설명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미 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을 가져오고, 유명한 감독을 초청하고, 권위 있는 기관의 복원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일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프로그래머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완전한 지도가 아니다. 오히려 편협하고 불완전하며 나중에 틀렸다고 판명될 수도 있는 지도다. 지금 어느 지역에서 이상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작가들이 어떤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지, 아직 이름조차 없는 경향을 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지 말해 주는 지도 말이다. 틀린 지도는 나중에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지도도 제시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평가할 판단 자체를 남기지 않는다.

 

이제 웬만한 영화는 영화제가 아니라도 언젠가 구해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제가 여전히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의 파일이 아니라 선택의 이유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전주는 아직 권위를 얻지 못한 영화에 자신의 권위를 빌려주던 영화제였다. 반면 요즘의 전주는 때때로 이미 권위 있는 인물과 기관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빌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다시 전주의 프로그램에서 보고 싶은 것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다. 아직 중요성이 확정되지 않은 영화에 먼저 자리를 내줄 수도 있고, 이미 익숙한 영화들 사이에 전에 없던 선을 그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에는 전주가 왜 이 영화들을 함께 보여 주려 했는지 말할 수 있었으면 한다. 단순히 좋은 영화들을 모아 놓은 영화제가 아니라, 그 영화들을 통해 무언가를 주장하는 영화제를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