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수 프로그래머는 영화제 프로그램의 중추에 해당하는 ‘월드시네마’, 역사와 정치를 가로지르는 도발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프론트라인’, 다양한 세대의 관객을 아우르는 ‘시네마천국’ 섹션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시기임에도 작품을 만들고 극장을 찾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폐막 이후, 다시 영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이 어땠는가.
영화제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다음 영화제 준비를 해야 했는데, 그래도 잠시 숨 돌릴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전처럼 해외 영화제 출장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해외 영화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그리고 친분이 있는 외국 배급사들을 통해 온라인으로 프로그래밍을 해야 했다. 그만큼 더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힘든 부분이었다.
올해 ‘월드시네마’ 섹션의 경향에 대해 소개해달라.
세계 각국에서 제작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월드시네마 섹션은 ‘영화제 프로그램의 허리’를 맡고 있는 중추적인 섹션이다. 작년에는 18편의 작품을 상영했는데, 올해는 그보다 많은 27편의 작품을 소개하게 되어 뿌듯하다. 올해 언급할 만한 부분은 문학이나 음악 등 다른 장르와의 결합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뤄낸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미니 섹션으로 꾸며지는 ‘밀란 쿤데라, 문학과 영화 사이’는 밀란 쿤데라에 대한 다큐멘터리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밀로슬라프 슈미드 마예르)를 보다가 그 안에 언급되는 밀란 쿤데라 원작 영화들을 다큐멘터리와 함께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기획하게 되었다. 〈농담〉(야로밀 이레시)을 비롯해, 1960년대 체코영화 황금기에 제작된 3편의 보기 드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는 영화 1편을 추천한다면?
루이스 핫핫핫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감독이 만든 첫 장편 다큐멘터리 〈네 개의 여행〉. 1979년부터 36년 동안 시행된 중국의 ‘한 자녀 정책’으로 인해 두 번째 자식인 감독은 태어나자마자 ‘불법적인 존재’가 됐다. 다행히도(?) 존재를 숨기고 살아온 그는 네덜란드로 유학까지 떠날 수 있었고, 이제는 어엿하게 미디어아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유럽까지 유학 보낸 부모에 대한 부채의식과 함께 어려서부터 따뜻한 가족의 정을 느껴보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원망도 동시에 존재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감독의 네 번의 여행에 동행하면서 어느새 그의 복잡한 심경에 감정이입이 될 것이다.
‘프론트라인’은 작년에 부활한 섹션이다.
‘영화보다 낯선’이 주로 형식적인 실험과 도전에 초점을 맞춘 섹션이라면, 프론트라인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도발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상영한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섹션이라고 할 수 있다. 매끈하고 세련되기보다는 거칠고 날것의 느낌을 갖는 작품들을 통해 ‘전선에 서 있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특별히 주목할 만한 점은 무엇인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나 인종과 성차별 등 인권 문제도 그렇지만 최근에는 홍콩 민주화운동, 미얀마 사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 국제 정세가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어서 프론트라인은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것 같다. 특히 독일의 다니엘 카르젠티 감독과 팔레스타인의 모하메드 아부게트 감독이 8년에 걸쳐 제작한 다큐멘터리 〈지옥의 드라이버〉를 추천할 만하다. 매일 팔레스타인 불법 노동자들을 태우고 이스라엘 지역으로 밀입국 영업을 하는 운전자들을 담았다. 세계 열강이 무책임하게 벌여 놓은 이 최전선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발버둥 치는 그들의 숭고하기까지 한 모습에 감동하고 또 분노할 것이다.
‘시네마천국’은 다양한 관객층을 아우르는 섹션이라 항상 기대가 있을 듯하다.
그렇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갖춘 영화들을 소개하며 ‘월드시네마’ 못지않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섹션이기도 하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독립영화를 많이 조명하면서 일반 관객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을 많이 상영해온 것이 사실인데, 그럴수록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작품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음식이나 여행에 대한 영화 등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많이 준비해서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크다.
특히 큰 호응을 기대하는 작품이 있다면?
〈자본주의를 향해 달린 자동차〉(보리스 미시르코프·게오르기 보그다노프)는 시네마천국 섹션의 의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비디오아트와 사진 작업으로 명성을 얻은 불가리아의 동갑내기 두 친구가 감독을 맡아 스코다(Skoda), 라다(Lada), 자즈(Zaz) 같은 생소한 브랜드의 차들을 매력적으로 담았다. 냉전시대 유고슬라비아, 체코, 헝가리, 동독 등 동구권 여러 나라에서 생산된 이 차들은 화려하고 성능이 뛰어난 서구의 자동차들과는 달리 ‘수수한 매력만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자동차들이다. 동구권이 몰락한 지도 이미 오래됐기에 이 차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아직도 이 차들을 수집하고, 운전하기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차들은 자유를 갈망했던 구 동구권의 많은 사람들을 서구 자본주의 사회로 탈출시킨 소중한 친구로도 기억되고 있다. 이후 펼쳐진 그들 각각의 삶과는 별개로.
올해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코로나 이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해외 초청, 좌석수 회복, 전주돔 설치 등 여러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요구하는 방역 절차 역시 영화제 사무국에서 꼼꼼히 챙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관객과 게스트가 기대와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부담도 많이 되지만, 또 그만큼 사고 없는 영화제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국내외 많은 영화인들에게도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영화제가 되었으면 한다.
Invitation Letter
코로나 팬데믹과 오미크론 변이까지 모두가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 역시 불안감을 더하고 있고요. 올해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이런 부분들을 담아낸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상이 된 마스크와 격리 생활, 불안해진 고용 문제, 오래된 분쟁 지역의 증오와 독재의 그늘에 이르기까지 영화인들은 다양한 시선으로 이 혼돈의 시대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렇듯 뛰어난 작품을 만들고 출품해 주신 감독 및 제작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이 관객 여러분에게도 많은 울림과 감동을 드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 2년 동안의 영화제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하지 못했다면, 올해는 최대한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여러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전주에서 뵙겠습니다.
Programmer’s Picks
Canada┃2021┃83min┃월드시네마
재즈 피아노의 아이콘, 네 개의 손을 가진 사나이, 오스카 피터슨. 그는 활동 초기 심한 인종차별을 겪으며 ‘자유를 위한 찬가’(Hymn for Freedom)라는 명 곡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누구보다 탁월했던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과 음악을 오롯이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Italy, France┃2021┃95min┃시네마천국
2016년 타계한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에토레 스콜라의 원작을 세르조 카스텔리토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다시 만들었다. 고지식한 서점 주인 빈첸초에게 찾아온 변화.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연출력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USA ┃2021┃96min┃개막작
제이크 가족 소유의 안드로이드 ‘양’은 아시아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양은 어느 날 갑자기 작동을 멈춘다. 2017년 〈콜럼버스〉로 데뷔한 한국계 미국인 코고나다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서정적이고 정적인 분위기의 독특한 SF영화로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France┃2021┃87min┃폐막작
호텔 룸메이드로 일하며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쥘 리. 그녀는 전공을 살려 안정적인 정규직으로 취업하고자 하지만 설상가상 터진 노란 조끼 시위와 파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에리크 그라벨 감독은 현실적인 묘사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 관객을 싱글맘의 숨막히는 상황에 몰아넣는다.
전진수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연출부, 음반 제작 프로듀서, 음악잡지 편집부 등에서 일하다가 프랑스로 가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다. 21세기가 되면서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15년 정도 여러 방송국에서 음악 해설도 했다.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프로그래머, 2006년부터 2019년까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프로그래머, 그리고 2020년부터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