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우는 현실과 감정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선과 악 어느 하나로도 규정할 수 없는 진폭을 만들어내며, 한국 독립영화의 결을 풍성하게 한다. 작품마다 어느 하나 닮지 않되, 그 퀄리티에 있어서 강길우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공으로 결국 귀결되는 연기. 〈여섯 개의 밤〉은 그가 오래 호흡을 맞춰온 최창환 감독과 다시 조우한 작품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화제작에는 꼭 강길우 배우의 필모그래피가 함께한다.

우선 올해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해주셔서 매우 기쁘고 감사하다. 2018년 〈한강에게〉(박근영)와 〈시체들의 아침〉(이승주)으로 전주를 찾은 이후로 5년째 개근이다. 해마다 3월 즈음이면 과연 올해도 전주를 방문할 수 있을지 기대하게 된다.

 

최창환 감독과는 〈파도를 걷는 소년〉(2019), 〈식물카페, 온정〉(2021)으로 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창환 감독이 그리는 ‘세상’에서 ‘강길우’의 역할은 어떤 것이라고 보나?

최창환 감독의 작품에는 현실과 낭만이 공존한다. 어쩌면 감독님은 나에게서 사실적(?) 얼굴과 나름의 멋을 발견했고 그래서 여러 작품의 대본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의 작업 방식이 익숙하고 서로 긴말 하지 않아도 소통이 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뢰의 어떤 것들이 있다. 그래서 아마 나와의 작업이 편할지도 모른다.(웃음) 한마디로 서로가 ‘취향’인 듯하다.

 

〈여섯 개의 밤〉은 엔진 결함으로 비상 착륙한 비행기 탑승자들을 통해 관계의 ‘결함’을 살펴보는 하룻밤의 이야기다. 예정대로 비행했다면 묻혔을 ‘문제점’들이 의외의 정체로 인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이 영화의 어떤 지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나?

살다 보면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에서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하면서 굳이 하지 않았던 혹은 피해 왔던 이야기들을 들추게 되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영화에선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중 누구는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을까 봐 ‘말이 나온 김에’ 위태로운 대화를 이어간다. 또 그중 누구는 하루밖에 시간이 없어서 불꽃처럼 행동한다. 이렇게 우연하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과 낯선 공간이 평소와는 분명히 다른 밀도와 집중의 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속의 내용도 꽤나 현실적이어서 매력적이었다.

 

규형은 결혼을 앞두고 여자친구 지원과 부모님이 있는 뉴욕으로 가는 중이었고, 잠깐의 ‘스톱’에서 결혼 자체를 점검해보는 역할이다. 결혼할 상대에게 상의 없이 뉴욕에 일자리와 터전을 이미 구해 놓았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현실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해서 많은 관객들에게 고민해볼 지점을 안겨준다. 배우로서 규형이 가진 복합적인 지점을 어떻게 해석했고,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

일단 ‘나쁜 놈’으로 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으려 했다.(웃음) 물론 많은 것들을 서로 양보하고 충분히 대화한 후에 결정한다면 너무나 아름답겠지만 배려의 기준도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도 각자가 다를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지난 이야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하면 안 된다.(웃음) 규형을 연기하는 입장에선, 자신이 그리는 삶의 모습을 지원의 눈으로 직접 보게 한다면 반드시 설득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절대, 결코, 기필코 안 된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양보할 마음 정도로 정리했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대화의 균형이라고 생각했다. ‘넌 내 결정에 따라’라고 하는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인물이나, ‘모든 걸 양보할게’라고 하는 아름다운(?) 인물은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범주에 들기엔 색이 짙지 않나. 그리고 표현에 있어 무엇보다 중점을 둔 부분은 규형과 지원의 깊어진 갈등의 골이다. 단편적인 대화 속에서 곪을대로 곪은 그간의 갈등의 층이 느껴졌으면 했다. 평소엔 잘 지내지만 작은 불꽃 하나에 대형 화재가 나는, 둘 사이에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음이 느껴지길 바랐다.

 

각 에피소드마다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영화다. 배우들에게도 도전이었을 듯하다. 규형과 지원의 의견 충돌이 고조되면서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는 롱테이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레퍼런스로 삼은 연기나 영화가 있었는지.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혼 이야기〉(노아 바움백, 2019)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레퍼런스로 두지는 않았다. 내 기억으론 처음부터 롱테이크로 촬영하려고 계획된 건 아니었다. 최창환 감독의 영화는 구체적인 콘티를 정해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로케이션과 현장에서의 배우 연기를 보고 앵글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현장에서 나와 지원을 연기한 김시은 배우의 리허설을 본 감독은 숨이 막혀서 여러 번 못 보겠다고 했다. 장면이 길기도 하고 감정이 너무나 격양되니까. 그래서 롱테이크를 선택한 걸로 기억한다. 둘의 긴장감 있는 대화를 담아내기에 가장 적절한 선택이기도 했다.

 

최창환 감독은 함께하는 스태프나 배우와 지속적인 작업을 하는 스타일의 연출자다. 최창환 감독과의 촬영 현장이 배우에게 주는 익숙함과 신선함은 어떤 것인가?

최창환 감독이 항상 하는 말 중 하나가 ‘연기는 배우가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배우에게 주는 ‘부담’이 아니라 ‘신뢰’다. 이래도 되나 하는 흐릿함 없이 내가 연기할 인물의 말과 행동은 내가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내 선택에 의심을 덜어주는, 신뢰를 주는 연출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것들이 많다. 과감하게 삭제되고 추가되는 부분도 많고. 이러한 작업 방식이 익숙해지면 많은 부분이 자유로워진다. 준비된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지금 눈앞의 것에 반응하게 되는 경험 말이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현장성이 곧 신선함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최근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을 통해 트랜스젠더 역할을 소화하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지치지 않고 작업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그냥 재밌다. 그리고 직업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연기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고. 왜 지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글쎄 아직 목이 마른가 보다.(웃음) 앞으로 어떤 작품과 인물들을 만나게 될지, 내 미래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국경쟁 부문에 오른 〈비밀의 언덕〉에서의 모습도 기대된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열두 살 소녀 명은의 성장기를 그린 작품이다.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지 조금 힌트를 준다면?

나는 명은의 아빠 ‘성호’를 연기했다. 명은이 보기에 성호는 놈팽이다. 일은 안 하고 놀고먹는 아빠 말이다. 이런 인물은 처음 연기했는데 재밌었다.

 

코로나 시국에 축제의 장은 더 힘들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에게 짧은 인사 부탁드린다.

올해는 다시 돔도 설치하고 코로나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무척 애쓰고 계신 것 같다. 아마도 관객들께서 보다 더 즐겁게 영화제를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관계자들과 마찬가지로 영화제에 참여하는 게스트들 역시 관객을 향한 마음이 우선일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많이들 오셔서 건강하고 즐겁게 영화제를 즐기시길 바란다. 영화제의 봄은 일교차가 크니 감기 조심!

강길우

연극 〈마법사들〉(2013)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단편 〈명태〉(2017)로 영화계에 얼굴을 알렸으며, 단편 〈시체들의 아침〉(2018)을 통해 제5회 가톨릭영화제 스텔라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이후 〈한강에게〉 〈파도를 걷는 소년〉 등 다수의 작품에서 차분하고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주며 한국 독립영화계 인정받는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최근에는 드라마까지 연기 영역을 넓히며 두드러지는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