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묵Memil
감독 김정민KIM Jungmin | Korea | 2026 | 33 min | Fiction | 한국단편경쟁Korean Competition for Shorts
김정민 감독의 단편영화 〈메밀묵〉에는 메밀묵을 좋아하는 도깨비의 여러 얼굴이 담겨 있다. 그들은 홀로그램처럼 관점에서 따라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꾼다. 할아버지의 옛이야기 속에서 도깨비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무서운 요괴다. 좌절한 창작자인 고모 해린이 과거에 쓴 동화책 『도깨비』에서 그들은 함께 어울리는 친구다. 고모와 고모의 작품을 좋아하는 소년 이안에게 도깨비는 요괴이자 친구다. 치밀한 구성 아래 동화와 호러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이안은 두 관점을 오가고 아우르며 자라난다. 이 작품으로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감독상을 수상한 김정민 감독에게 영화 속 선택들에 관해, 창작자로서의 고민과 동기에 관해 물었다.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글 쓰고 영화 찍는 김정민이라고 한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메밀묵〉이라는 단편영화를 연출했다.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이야기인가?
평소 생각하던 두 이미지를 합쳐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한 소년이 불러들인 요괴들이 집 안으로 우르르 들이닥쳐 음식을 먹어 치우는 이미지가 첫 번째였고, 밤에 어떤 과일을 먹으며 깊은 숨을 내쉬는 고모의 이미지가 두 번째였다. 이 두 이미지를 각각의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가 합쳐 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집에 소년과 고모가 함께 있는 자연스러운 상황은 무엇일까?’ ‘집으로 들이닥친 요괴들이 어떤 음식을 먹어 치워야 소년이 좋아할까?’라는 질문이 이어졌고 추석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명절이 되면 늘 고모를 봤고, 어린 시절 차례 음식을 음복하기 싫어했던 개인적 기억이 떠올라 추석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른 것 같다. 한국 전통문화를 키워드로 생각하다 보니 이어서 자연스럽게 도깨비, 메밀묵 같은 요소가 떠올랐고 추석날 명절 음식으로 나오는 메밀묵을 먹기 싫어하는 소년과 고모가 함께 집 안으로 도깨비를 불러들이는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었다. 거기서 시작해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변형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 나의 경험과 기억, 예술의 역할에 대한 고민, 가부장 문화에 대한 생각이 틈입해 들어왔고 지금의 시나리오로 완성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도깨비에 관해 무서운 옛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알고 보면 도깨비는 딱히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갚는다. 도깨비를 주요 소재로 다루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또 그들을 어떤 존재로 그리고자 했나?
‘도깨비’ 하면 ‘메밀묵을 좋아하는 존재’라는 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도깨비들이 집 안으로 우르르 들이닥쳐 메밀묵을 먹어 치우는 이미지를 찍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도깨비를 주요 소재로 선택한 첫 번째 이유였다. 그런데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도깨비가 요괴로 인식되는 한편 친구 같은 존재로도 자주 다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어린 시절 본 만화에서도 도깨비는 인간의 친구였다. 요괴로 불리지만 친구일 수 있다는 포인트가 좋았다.
하지만 마냥 친구 같은 이미지로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관점에 따라 요괴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 〈메밀묵〉에서는 도깨비들을 나름의 생활 방식이 있고 메밀묵을 좋아하며 메밀묵을 주면 석류로 보답하는 존재로 그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쫓겨나 산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 정도로 묘사했다. 그 이상은 묘사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영화에서 도깨비는 메밀묵을 준다고 해서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메밀묵을 받고 한 행동이 이안과 해린에게는 선물이 됐을 뿐이다. 그들의 이미지와 행동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캐릭터들이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 무엇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이안 역을 맡은 아역 배우 한지안의 연기가 돋보인다. 연기 디렉팅을 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무엇인가?
연기 디렉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캐스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의한다.
한지안 배우와 처음 미팅했을 때 우선 그 이미지가 너무 좋았다. 매력적인 얼굴이라 생각했다. 묘하게 요정 같기도 하고 도깨비 같기도 해서 그 이미지에 끌렸다. 이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지안 배우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엉뚱하고 예상 못한 답변을 연속으로 해서 그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됐다. 그런 부분들이 이안이라는 캐릭터와 맞겠다 생각했고, 촬영 때는 내가 본 지안 배우의 인상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다. 촬영 초반에는 본인이 연기를 위해 준비한 대사 톤과 표정이 있었는데, 지안 배우와 대화하며 원래 말투와 표정이 훨씬 좋다고 말해 줬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아역 배우가 금방 요청을 반영하고 연기를 수정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역 연기 연출이 사실상 처음인데, 경험 있는 동료들의 말을 들으니 아역에게 요청을 빠르게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지안 배우가 대부분의 컷에서 내가 요청한 대로 곧바로 말투를 변경하고 그에 맞게 표정을 지어 줬다. 〈메밀묵〉 촬영 당시 지안 배우는 열 살이었는데, 요청에 따라 연기를 바꿔 주어 신기했다. 물론 요청한 것이 반영되지 않는 컷들도 있었다. 그럴 때는 테이크를 여러 번 갔다. 하도 많이 가니까 스태프들이 징글징글한 눈으로 나를 봤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편집실에서 보니 두세 번째 테이크의 연기가 좋았던 경우가 많았다. 내가 그 어린 배우보다 판단을 못한거다. 재능이 뛰어난 배우가 우리 영화와 함께해 줘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극 전반에 흐르는 동화 같은 분위기는 때로 순식간에 공포스럽게 바뀌면서 독특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형성한다. 이런 전환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선택들을 했는지 궁금하다.
주로 도깨비가 등장하거나 존재를 드러낼 때 긴장감이 형성된다고 봐주시는 것 같다. 사실 해린이 밤에 메밀밭으로 홀리듯 걸어 들어가는 신을 제외하고는 딱히 공포에 초점을 맞추고 컷을 구성하거나 연출하지는 않았다. 다만 도깨비 외형이 섬뜩하지만 묘하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도깨비라는 존재는 동화가 될 수도 있고 호러가 될 수도 있다. 그 경계에 놓이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도깨비가 동화와 호러의 경계에 놓인다면 분위기 전환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깨비가 동화인지 호러인지 모호하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는 사운드에도 초점을 뒀다. 믹싱 당시 사운드 감독님과 앰비언스와 방울 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음악 감독님과도 오래 소통하며 음악을 만들었다. 밤에 펼쳐지는 메밀밭 신을 제외하고는 도깨비가 존재를 드러낼 때마다 듣기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앰비언스와 방울 소리를 선택했고 음악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눈으로 보이는 도깨비들의 이미지는 섬뜩하지만 귀로 들리는 그들의 존재는 아름답거나 신비롭길 원했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간극이 도깨비라는 존재를 동화와 호러의 경계에 가져다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사운드 감독님과 음악 감독님이 제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좋은 작업물을 만들어 주셨다.
이안이 고모를 따라 밤에 메밀밭에 갔을 때는 공포스럽게 연출하려 했다. 이안이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들은 직후라 도깨비를 경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방울 소리나 음악이 날카롭고 무섭게 들리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 순간만큼은 이안이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홀린 것처럼 말이다. 대신 그때는 도깨비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지 않았다. 도깨비가 완전한 호러로 확정 지어지는 것이 싫었다. 이안이가 느끼는 공포는 그가 직접 본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가 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원인이지 않나.
고모 해린과 조카 이안은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해린이 쓰고 그린 동화책 『도깨비』는 이안이 쓰고 그린 『메밀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두 인물, 그리고 두 동화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
어릴 때를 돌이켜 보면 친척 중 부모님보다 나와 닮았고 통한다고 느끼는 어른들이 더러 있었다. 어린 나를 부모님보다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해 준 그 어른들 덕에 내가 고민 많은 아이였음에도 버티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안에게 해린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모습대로 성장할 수 있게 배려해 주는 사람. 그렇기에 『도깨비』와 『메밀묵』이라는 두 동화는 서로에게 쓴 위로와 응원의 편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모는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담아 어린 누군가가 위로받고 용기를 얻길 원해 동화를 만들었을 것이고, 그 마음이 조카인 이안에게 가닿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안이 지금보다도 더 어린 시절에 『도깨비』를 읽고 좋아했다고 설정했는데, 그 내용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해도 고모의 동화에 담긴 마음은 이안에게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모가 스스로 망했다며 동화를 포기하려고 할 때 이안은 고모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메밀묵』이라는 동화는 이안이 고모의 동화에 보내는 답장이지 않을까 싶다. 좋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고, 고모가 틀린 게 아니라고. 다시 일어서 달라고.
해린이 뒷모습을 보인 채 자신이 동화 작가로서 “망했다”라며 작품을 어차피 “아무도 기억 못 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슴 아팠고, 그 안에 감독님의 창작자로서의 고충이 담겨 있다고도 느꼈다. 이에 관해 더 들어 보고 싶다. 또 감독님이 창작을 계속해 나가는 동기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려운 질문이다. 최근 들어 이 주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고민이 끝나지 않았다. 사실 창작자로서 해린의 고민과 나의 고민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작품이 좋은 성과를 내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이 내게 창작의 가장 큰 동력이자 핵심은 아니다. 하지만 작업을 이어갈수록 그 부분을 외면하기 어렵다는 고충도 있다. 내가 만드는 창작물이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을 최근 들어 많이 한다.
그럼에도 아직은 기억되지 못하는 예술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 역시 내 영화가 누군가에게 잠깐의 감정적 동요라도 일으키고 그 잠깐의 순간이 어떤 관객들에게는 영원히 기억되길 원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가치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창작을 멈추지도 않을 것 같다. 창작의 동기와 핵심은 ‘성과’보다 창작자의 ‘호기심’과 ‘습관’이라고 믿는다. 나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고 만들어서 내 눈앞에 스스로 펼쳐 놓고 싶은 이미지들이 있다.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익숙하고 즐거운 방식이 영화 만들기다. 만들고 싶은 것이 있고 만들 여건이 된다면 계속 만들고 싶다. 만드는 행위 자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창작의 동기인 것 같다.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앞으로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가?
당분간은 지금 쓰는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투자를 받든 지원 사업에 제출하든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길어지면 단편영화를 만드는 등 창작 작업을 쉬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지도 정해 놓지 않는 편이다. 다만, 그것이 소재든 형식이든 내가 호기심이 생기고 만들 때 즐거울 것 같은 작업이라면 어떻게든 만들려고 할 것이다. 영화 제작이 워낙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작업이다 보니 그런 즐거움이 있지 않으면 내가 끈질기게 하지 못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