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맑은 밤〉으로 한 차례 전주를 찾았던 아이제이나 머디나가 신작 〈갱스터리즘〉으로 돌아왔다. 영화 제작을 갱스터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이번 영화에서, 머디나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전쟁과 학살, 영화를 둘러싼 디지털/온라인 환경 사이에서 영화로 발화하는 것 자체를 사유하길 시도한다. 영화를 통하여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갱스터적 태도가 영화 만들기로 되돌아오는 〈갱스터리즘〉의 기묘한 궤적은 러닝타임 내내 우리의 생각을 활성화한다. 영화를 보며 떠올린 많은 생각 속에서 던진 우문에 머디나 감독이 보낸 성실하고 풍부한 답변을 공유한다.


우선 ‘갱스터리즘’이라는 제목에 관해 묻고 싶다. ‘갱스터’라는 장르에서 떠올리는 폭력, 이를테면 총격이나 폭행과 같은 요소를 이 영화는 (거의) 배제한다. 욕설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갱스터 영화라고 하면 무수한 대사 인용구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이 영화는 갱스터로 지칭된 예술가들이 주고받는 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갱스터라는 지위가 인물들에게 마음대로 말을 내뱉을 권한을 부여하는 것으로 작동했다면, 〈갱스터리즘〉은 영화에 대한 언쟁부터 학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한 강렬한 대화들을 자유롭게 포함하고자 ‘갱스터’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다가온다. 갱스터라는 영화적 장치를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어렸을 때 갱스터 영화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삶에서 뭔가 시도해 보도록, 하고 싶은 말이나 일을 해보도록 영감을 주는 게 좋았다. 스탠리 큐브릭이 예술가와 범죄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거기엔 어떤 울림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성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아테나에서 범죄자로 취급당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이는 법에 맞서 욕망의 편에 서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예술 세계에서조차 대부분은 법의 현실주의 편에 서 있다. 결국 자유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이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면 뭘 하든 항상 범죄자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다. 어떤 영화나 책을 얼마나 많이 보거나 읽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다면 알 게 뭔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누구도 나를 사유하는 인간으로 존중해 주지 않으리란 걸 이제는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매 순간 내가 느끼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 ‘그거 진짜 갱스터네’ 같은 말은 그저 긍정적인 표현이었다. ‘우와, 저거 진짜 변호사 같다’라며 좋아하는 아이는 없지 않은가. 너무 많은 이들이 ‘변호사주의’에 빠져 자기들의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죽이려 든다.

 

어떤 면에서는 전작인 단편 Semi-Auto Colours나 첫 장편 88:88 등 위니펙에서 제작한 영화들이 더 갱스터 영화 같다는 인상을 준다. 나고 자란 동네에서 정말로 감독님의 갱이라 부를 수 있을 사람들이 구조화되지 않은 말을 내뱉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편 Inventing The Future맑은 밤처럼 필름메이커들이 연기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보다 구조화된 대사로 채워진 영화에선 감독님의 갱이 ‘동네’가 아니라 ‘영화계’ 혹은 ‘예술계’로 옮겨 간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겹치는 출연자도 있지만 말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장소와 동료의 변화가 만들어 낸 영화적 변화가 있는지 묻고 싶다.

영화에 등장하는 서클은 여전히 지역적이고 그래야만 하는데, 영화 만들기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계나 영화계 사람들을 잘 모른다. 그냥 몇몇 예술인, 몇몇 필름메이커, 몇몇 사상가를 알고 작가나 비평가도 조금 알 뿐인데, 우리는 함께 뭔가를 만든다. 나는 그렇게 만든 걸 어떻게 대형 스크린으로 볼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보고 때로는 누군가가 도와주기도 한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예술계 같은 건 없고 그저 몇몇 화가와 딜러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나머지는 친밀함의 탈을 쓴 가장무도회일 뿐이다.

어렸을 땐 예술인들하고만 지냈는데 점점 다른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고, 그러면서 실제로 사유나 작업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예술에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번듯한 직업을 지키면서 예술과 예술인 주변을 맴돌며 고상한 취향이 있는 듯 행동하고, 자기 삶이 단순히 재산 관계에 따른 선택의 부속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고픈 사람들이다. 나는 이 말을 자주 인용한다. 누가 스물에 시인이라면 스물이라 그런 거지만, 마흔에도 시인이라면 정말로 시인인 거라고. 그런데 마흔이 넘어 혼자 있을 때조차 시인이 아닌 자들이 있다.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2026년 최고의 영화 열 편을 추린 보잘것없는 리스트를 내놓곤 하는데, 그건 영화에 대한 어떤 ‘사유’라기보다 자기의 정보 접근성을 과시하는 데 가깝다. 또 칸영화제 라인업 예측 같은 것도 늘어놓아야 한다. 그게 이 세계다. 나이 들어 가는 ‘신스터scenester’들과 ‘신스터리즘scenesterism’의 세계. 그들은 예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여행이나 치즈, 혹은 부르주아적 불륜(프롤레타리아적 불륜과는 분명히 다른데, 이건 다음에 이야기할 문제다), 시골 별장이나 학위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만큼만 예술을 좋아한다.

물론 예술은 예술계 너머의 세상을 바꾼다. 다만 우리가 예상하는 시간의 단위로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예술은 사유의 역사를 바꾸고 사유는 언제나 ‘-계’보다 중요할 것이다. 나는 특정 속도로 사유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들며 그렇기에 그 속도를 가능하게 해주는 서클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예술계든 영화계든 뭐든 간에 우리가 원하는 속도로 만드는 것을 멈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예술계’라는 말은 ‘인간 동물’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계’나 ‘동물’에 대한 선호가 숨겨져 있으며 우리의 주체성을 빼앗고 우리를 유한한 존재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 예술계가 부과하는 그 모든 제약과 현실주의는 신기루 같은 것으로, 큐레이터나 후원자가 끔찍한 취향을 전시할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예술인이 그저 믿어 주길 바라는 무엇일 뿐이다. 한편 많은 이들이 아직도 부모를 위해 예술을 만들고 부모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걱정하고······ 뭐 그런 식이다. 

인물들이 대본을 따르는지 즉흥적으로 말하는지와 관련해 대답하자면, 그 둘이 내겐 다르지 않다. 나는 즉흥적으로 대본을 쓰고 즉흥적으로 말할 때면 오히려 대본을 따르는 듯 느낀다. 초기작에는 즉석에서 나온 말이 좀 담겨 있긴 한데, 그것도 상당수 언젠가 실제로 했던 말을 내가 촬영 시 다시 말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내 대본의 많은 부분은 나나 친구들이 이른바 현실의 삶에서 했던 말로 이뤄져 있다.

결국 나의 서클은 예술인들이나 어떤 식으로든 사유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꼭 예술과 관련될 필요는 없다. 그냥 친절한 사람이어도 된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말했듯 영화계 사람들은 그가 길거리에서 만난 누구보다 무례하다. 서클은 ‘-계’를 포함해서는 안 된다. 서클은 세계 속에서 살아남으며 그것과 싸우도록 도와주는 무엇이다.

장소나 협업자의 변화가 내 영화의 형식을 바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영화는 전작들, 역사적인 작품들, 혹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과의 내재적인 관계 속에서 형상을 갖춘다. 나는 ‘-계’가 아니라 작품들에 응답한다. 세계에 직접 다가갈 수는 없다. 세계가 우리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왜 꼭 이런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이해하려면 형식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의 주요 장소는 온라인이 되었다. 〈갱스터리즘〉에서 영화의 유출과 불법 복제가 주요하게 다뤄지듯, 실제로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의 온라인 스크리닝 이후 영화에 대한 해적질과 비합법 유통이 과거보다 활성화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현재 영화의 비합법 유통이 각자의 외장 하드와 클라우드 스토리지를 창고 삼는 금주법 시대의 갱스터 같다는 생각도 든다. 스필버그의 〈A.I.〉,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 D.W. 그리피스와 존 포드, 태그 갤러거와 하스미 시게히코 등이 뒤섞여 언급되는 이 영화는 영화 해적들의 하드 디스크 속 랜덤한 영화 리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님의 어느 인터뷰에서 유튜브에 영화를 공개했다가 어느 순간 내렸다고 언급한 대목을 읽었다.(지금도 몇 편은 공개 중이지만 말이다.) 디지털 영화에 대한 해적질과 비합법 유통이 더 활발해진 가운데 영화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입장에서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디지털 기술과 함께 새로운 영화적 형식이 폭발적으로 생겨날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사유를 결여한 시네필리아의 폭식만 있을 뿐이었다. 둘은 전혀 다르다. 한번은 어느 상영회에서 화장실에 갔더니 옆 사람이 소변을 보며 레터박스에 영화 평점을 매기고 있었다. 지금의 실태를 잘 보여 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배설물을 생산하는 것과 영화에 관한 사유를 생산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영화 볼 권리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영화에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 오줌 누기와 사유하기가 같다고 여기는 듯하다. 나는 사유하기란 존재하기와 같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눈앞에 있는 무엇을 사유해야지 사유의 가능성을 오줌 누듯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둘 다 생각 없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평점 매기기 등과 오줌 누기는 연결되어 있다.

저예산 영화나 실험 영화의 경우, 어떤 사람들은 유출된 버전을 보고 (생각 없이) 작품 노출을 늘려 주는 방식으로 영화인을 돕는다고 여긴다. 남들보다 먼저 무엇을 보려는, 아니 먼저 관람 기록을 남기려는 욕망은 정말로 어리석다. 당신 삶에 솔직히 별 다섯 개를 줄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영화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그 점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 온라인에서 누가 새로운 존재론이나 몽타주 이론, 그 밖에 무엇이든 만들어 낸 적이 있나? 그냥 삶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아닌가? 1만 편의 영화를 봤대도 단 하나의 아이디어도 없을 수 있다. 나는 ‘수집가’적 의식, 멍청한 심미가, 취향 트렌드를 주도하고 싶어하는 싸구려 욕망, 와인, 커피, 여행, 영화 수집가 들이 역겹다고 생각하며 그 모든 것에 반대한다. 뭐 좋다, 물론 그렇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영화라는 사유의 매체에서 한몫하려 들고 자기 의견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는 게 문제다. 

필름메이커들도 때로는 직접 돈을 들여 자기 영화를 극장에 걸어 보고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형식이 등장했을 때, 영화를 만들지 않는 큐레이터가 그것을 항상 알아보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같은 뛰어난 비평가조차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은 언제나 다른 예술가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먼저 자기 안에서 알아봐야 한다.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형식이 등장했을 때 누가 무엇을 알아챌 수 있는지와 관련해 요즘 일종의 궤변이 널리 퍼져 있다. 창작보다 큐레이팅을 하려는 욕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실은, 예술 창작을 무(無)에서의 발명이 아니라 단순히 취향을 큐레이팅하고 공유하는 행위로 바라보는 빈곤한 관점과 연결되어 있다.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수학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현 상황에 드러나는 영화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와 혐오가 싫다. 영화라는 문제를 다룰 때는 ‘로고스’ 너머에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틱톡에서는 마지막에 항상 ‘로고’가 등장하고 한편으로 워터마크는 스크리너를 오염시킨다. 사람들은 영화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텍스트와 로고를 읽는 데 익숙해지는 중이며, 이제 간략한 기록 남기기logging와 사유하기는 같은 의미를 띠게 되었다. 

내 영화의 온라인 공개와 관련해 답하자면 그 결정은 특정 시점에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또 해당 작품에 대해 어떤 배급 전략을 취하는지에 달려 있다. 일정한 법칙은 없는데, 사고는 그런 식으로 법칙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고 만일 어떤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유한함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영화가 어느 극장이나 행사에서 상영된다면 그 시기에 맞춰 초기작 몇 편을 다시 온라인에 올릴 수도 있다. 혹은 다시 내릴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에 따라 몇몇은 전체 작품 목록에 포함하고 몇몇은 제외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과거 작업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

영화를 자유롭게 다운로드해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실현된 유토피아적 상황처럼 보이며 공산주의적 풍요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를 그에 맞는 크기, 즉 대형 스크린으로 제대로 보는 것과 관련한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대형 스크린 상영은 자본 및 배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예술인들이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하루에 서른 편씩 보면서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취미가들의 즐거움을 위해 영화가 유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갱스터리즘〉에서는 후기 자본주의, 식민주의, 인종 차별, 학살과 같은 주제가 주요하게 언급되지만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논평이 담겨 있진 않다. 한편 지금의 온라인에서는 그런 주제들이 담긴 적나라한 폭력과 차별의 이미지가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등을 통해 유통된다. 그렇게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들 앞에서 영화를 만들고 본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갱스터리즘〉도 일정 부분 이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현실의 폭력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는 대신, 이번 상영 섹션의 제목처럼 ‘가능한 영화’의 형태가 그 자체로 발화가 되는 영화랄까. 영화를 보며 고다르나 스트로브-위예 등이 만든 정치적 영화를 떠올렸다. 정치적인 주제들을 영화의 형식으로 옮겨 오며 참고한 핵심 레퍼런스가 있는지 궁금하다.

중요한 것은 형식과 형식의 역사를 사유하는 일이다. 그 역사 속에서 다음에 무엇이 올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무엇이 어디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예이젠시테인은 한때 디즈니를 참고했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나 〈판타지아〉에 대한 사유를 거쳐 〈알렉산더 네브스키〉와 〈이반 대제〉로 나아갔다. 물론 디즈니는 한 사례일 뿐이고 그는 제임스 조이스나 카를 마르크스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나는 집합론을 들여다보는 한편 뮤지션 예Ye에게도 관심을 두는데, 후자는 예이젠시테인이 디즈니를 참고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Leave the World Behind〉를 부른 영상을 가져와 속도를 늦추고 높이고 잘라 내면서 나는 예의 앨범 〈Cuck〉에 수록된 곡 〈Cousins〉의 가사를 떠올렸다. “And that one time that you left me, I didn’t get no sleep that night / And that one time that you left me, I took ten Percs to get high / Ten Percs to get high, pray that I don’t die / But if I die, I’ll see you in the sky / Two pints of the Qua’-Qua’, don’t leave just stay bae / Let’s go on a vacay, leave the world behind / Leave the world behind.” 

형식의 발명가가 언제나 우리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술인은 발명이 실제로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늘 질문해야 한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는데, 정치 문제를 영화 형식으로 번역하려 하기보다 예술의 문제와 내재적으로 연결된 영화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유, 혹은 영화적 사유가 어떤 모습을 띠는지 보는 것이 먼저다. 사유가 어떤 형상인지를 본 다음에야 우리는 정치를 영화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리피스와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모두 병렬 몽타주를 사용한다. 어떤 정치적 견해를 지녔든 우리는 클로즈업과 교차 편집을 섞어 그리피스적 방식으로 스토리를 게시하고, 그럼으로써 그 형식의 모든 역사도 함께 떠안게 된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프레임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식에 가장 먼저 도달한 이는 해당 형식과 정치의 관계를 가장 먼저 사유할 기회 또한 얻게 된다. 그 최초의 연결, 우리가 이후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씨름하게 될 관계를 말이다. 그 관계란 중립적이지 않으며 시작점에서의 우연한 순간이 추후 방향과 수용 방식을 결정한다. 나는 예이젠시테인이 그리피스보다, 혹은 고다르가 스필버그보다 많은 것을 발명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파뇰 역시 많은 것을 발명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를 들여다보고, 대형 스크린이나 휴대폰 화면에 무엇이 나타나는지 살피며,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을 아울러 지금 이 순간의 시야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컷이 만들어 낸 몽타주와 간헐적 메커니즘이 세계를 어떻게 보이게 하는지 사유하도록 하는 형식을 고민해야 하며, 또 컷과 간헐성의 관계 자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주 많은 것이 있지는 않다. 교차 편집, 쿨레쇼프 효과, 지적 몽타주, 점프컷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전부를 담아낼 다음의 현시적 이미지manifest image가 무엇일지 알아보면서 새로운 컷을 더해 세계가 진실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실험을 시작해 볼 수 있다.

 

좌파 가속주의의 주요 저작인 『Inventing the Future』를 일종의 원작 삼은 동명의 영화에서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감독님 영화의 대사는 소위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다양한 ‘-주의-ism’를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이번 영화는 제목부터 그렇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런 대사는 제작에서 유통과 비평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생애 주기와 영화 제작자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대사를 쓸 때 무엇을 주요하게 고민하는지 궁금하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내가 듣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키런 데일리Kieran Daly는 음악은 언어가 아니지만 어쩌면 언어는 음악적 행동의 한 형태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냥 내 귀에 좋게 들리는 것, 영화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 삶에서 말하거나 들은 것, 말했어야 하는 것, 더 많이 말했어야 하는 것, 혹은 내일 말해야 할 것을 대사로 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는 상황은 드물다.

한번은 순전한 무성 실험 영화를 만들 생각이 있는지 질문받은 적이 있는데, 세계의 역사를 생각하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완전히 거부하는 일은 너무 쉽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주변화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는 읽거나 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언어를 가장 큰 무한이라고 여기진 않지만 그렇다고 언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또 배경상 나라는 존재가 언제나 자연히 의미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지는 않는 만큼, 언어를 상대적으로 작은 무한 중 하나로 여기더라도 나는 그것을 사용해야만 한다.

대사의 서사적 전개에 관해서라면, 현실에서 우리가 서사에 따라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친구들과 그저 어떤 아이디어들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어떤 행동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랑해’는 하루의 흐름을 바꾸거나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 내고 ‘저기 가서 영화 보고 어디서 저녁 먹자’ 같은 행동이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 속 대화의 대부분은 아이디어에 관한 것이다. 

‘-주의’에 관해서라면, 사유의 상당 부분은 어떤 대상이 하나의 -주의가 되기 전에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주의로 형성되어 가는지 파악한 후 다시 해체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아이디어가 어떻게 형태를 갖추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히치콕은 영화란 삶에서 지루한 부분을 잘라 낸 것이라고 했지만 내 영화 속 대사는 날씨 얘기만 빼면 친구들과 실제로 나누는 대화와 같다.

혹자는 내 영화 속 인물들이 단순한 대변인처럼 말한다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어떤 아이디어를 품으면 우리는 사유의 대변인, 자기 자신의 대변인이 되므로 그 점이 문제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다. 삶에서 말하기 어려운 모든 것은 우리가 잠시 더 큰 무엇, 혹은 아직 우리 존재가 충분히 익숙해지지 못한 어떤 아이디어의 대변인이 되어야 할 때 생겨난다. 처음 내뱉는 ‘사랑해’나 처음 맞이하는 깨달음의 순간은 바깥으로부터, 즉 나 바깥의 또 다른 나로부터 온다. 마치 어떤 주체성에 의해 호명되는 것과 같고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을 따라잡으려 애쓰게 된다. 일상 속 평범한 대화는 우리가 자유로이 대변인이 되었던, 혹은 공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끔 사유하던 다른 대변인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모든 순간의 파편이 유한한 형태로 재조합된 것에 불과하다.

 

영화 제작을 다룬 이 영화에 EZ 역의 칼릴 하다드Kalil Haddad나 마치 역의 샬럿 장Charlotte Zhang 등 필름메이커들이 배우로 출연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려운 단어로 구성된 대사를 비전문 배우가 소화하기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감독님과 동료들이 영화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엿듣는다는 인상도 받았다. 그들과의 협업은 어땠는지,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좋은 시간이었다. 분위기가 무척 편안했고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 최고의 현장이었던 것 같다. 동료 필름메이커들에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많고 그들은 내 방식대로 영화를 만들도록 해준다. 나는 대규모 현장 경험이 너무 많은 배우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취향을 지닌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나쁜 연기를 하게 된다. 배우는 제작 방식을 이해하고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감을 갖추고 있어야 더 좋은 연기를 선보일 수 있다. 고유한 제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는 자신이 경험한 다른 현장들을 기준 삼아 왜 똑같이 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왜 쓰레기 같은 것을 찍지 않느냐고 묻고 엑스트라나 스태프는 주연 배우와 다른 식사를 해야 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우리 현장에서는 모두가 같이 식사하며 두 시간 동안 수다를 떨 수 있다. 그중 몇몇이 모여 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나 역시 함께 작업을 이어 간다. 모두가 함께하는 점심시간은 더 좋은 영화, 더 많은 영화로 이어진다. 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가진 자원을 활용해 모두가 최대한 유토피아적인 하루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경험이 진실하다면, 스크린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더라도 적어도 컷 속에서 유토피아적 요소가 느껴진다고 생각한다.

 

〈갱스터리즘〉은 첫 장편영화 〈88:88〉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 제작됐다. 영화 제작을 다루며 종종 실제 일화처럼 느껴지는 상황과 대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는 감독님의 지난 10년에 대한 회고적 성격을 띠는 것도 같다. 지난 10년에 대한 소감을 여쭤보고 싶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지금 내가 거의 죽어 있다고,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느낀다. 더 많은 영화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더 사유하고 더 화내고 더 비판하고 더 사랑하고 더 친절하고 더 거칠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받아들이고 따를 조언 같은 건 없고 오직 형식만이 중요하며 모두가 지루하고 모두가 생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해 형식을 발명하지 않는다. 더 무심하고 덜 보고 더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 어떤 답도 다른 영화에는 없기 때문이다. 0달러 혹은 10만 달러로 뭘 만드는 것에는 실질적 차이가 없으나 훌륭한 영화를 혼자 혹은 함께 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모든 영화는 누군가와 함께 봐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더 많은 영화를 만들 시간을 가지고 비하인드 신을, 특히 현장의 첫 순간을 더 많이 남기고 더 많은 기회를 잡았어야 한다. 좋은 영화는 ‘사랑해’ 혹은 ‘증오해’라고 말하며 나는 사랑한다고 증오한다고 더 많이 말했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에게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하라고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주고 싶다. 사회성은 현실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고 모든 현실주의는 살인이며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영화의 세계에서는 배운 것을 매일 다시 잊어버려야 한다고, 영화의 유일한 즐거움은 그것을 만드는 데 있으며 마일스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 만드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고, 걸작을 만들려는 욕망은 그것을 만드는 순간이 즐겁다는 데서 비롯하며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건 병든 사람뿐이라고, 영원은 창작의 순간 자체에 있다고, 그러니 가능한 한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시네필들은 무시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영화가 아니라 영화제를 보고 쓴다는 사실을 배웠는데 그 둘은 다르며, 또 내면에 백인 우월주의가 실재하는 탓에 사람들이 이쪽저쪽의 입장을 모두 취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책장 가득한 책들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기어다닐 정도로 학식을 숭배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가까운 이들이 노예제, 학살, 국가를 정당화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리란 사실을, 회의주의는 부유한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88:88〉을 만들었을 때 많이들 내가 철학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드는 멍청이 딜레탕트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얼마 전 저널 『Crisis and Critique』에 〈컷은 사유의 한 형식이다Cut is a Form of Thinking〉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그 말을 떠올렸는데, 진실은 그러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이며, 당신이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보일 수는 없고, 다섯 명 정도를 제외한 모두에게 당신은 영원히 일종의 동물일 뿐이므로 그냥 계속 영화를 만드는 것이 좋고, 살아 있다는 것의 요는 그들이 스무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당신이 공공연히 자유롭게 사유하는 데 화가 나 조용히 수군대거나 온라인에서 고함치는 것인데,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이며 결국 자기들만의 방음 공간에 머무는 셈일 뿐이다. 나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미래의 범죄들〉을 보고 공무원이면서 큐레이터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 실존한다는 것을, 그런 일이 적어도 1990년대부터 계속됐다는 것을 알았다. 또 오늘날 몇몇 큐레이터가 리노 브로카를 ‘필리핀의 파스빈더’라고 부르길 좋아한다는 것을, 일종의 습관적 잘난 척이 만연하다는 것을, 영화 마라톤 상영회를 하면서 마리 멘켄의 작품을 ‘전환용’으로 끼워 넣고 관객이 ‘이게 뭐야’ 하면 가볍게 건너뛴 다음 다시 쓰레기 같은 영화로 넘어간다는 것을, 예술계 종사자 대부분이 당연하게도 사기꾼imposter 증후군을 지녔으며 대개 사기꾼들이 공모해 돈, 저속한 작품, 얄팍한 취향이 지적 삶을 지배하도록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시를 더 많이 쓰고 수학을 더 많이 했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후기작은 싫어하면서도 첫 장편은 좋아하는데 젊음과 발견을 페시티화하기 때문이다. 키런은 우리가 예술 형식 자체를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이라고, 자기 자신이나 친구, 팬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했는데, 취향 트렌드를 주도하려는 자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만든다고 여기므로 우리는 그들을 혐오한다. 지난 10년간 내 기분은 똑같은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주변에 영화, 예술, 철학,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별로 없고 대신 많이들 돈, 리얼리즘, 업무, 아이, 결혼, 국방, 휴가, 자산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며, 모두가 가족에 관한, 가족을 위한, 혹은 미래의 가족을 꾸릴 돈을 벌기 위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랑과 가족이 같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사유와 철학이, 정치와 국가가, 영화와 무빙 이미지가 같지 않듯 그 둘이 같지 않다는 것을 배웠고, 이 나이에도 새 친구 만들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새 친구와 오랜 친구는 같다는 것을 배웠다. 영화 만드는 일을 지나치게 각별히 여기진 않는 법을, 새가 노래하듯 영화 만드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