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슈〉는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루오무의 황혼〉과 여러 면에서 연속성을 지닌 작품이다. 쓰촨성을 배경으로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 외에도 타지에서 산책하는 인물들의 리듬, 장소에 밴 과거의 흔적, 픽션에 스며든 현실의 기운, 장면을 떠도는 유령의 잔상,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 등을 공유한다. 〈춘슈〉와 〈루오무의 황혼〉은 기묘하게 마주 보는 세계다. 두 영화는 장소가 안긴 우연한 감흥에서 출발해 장률이 영화로 산책한 길이자 사라질 풍경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춘슈〉는 〈루오무의 황혼〉 이전에 촬영을 마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어떤 계기와 감흥이 두 영화로 이끌었는가?

쓰촨성 청두에 오래된 영화 스튜디오가 있다. 1950년대 후반에 세워진 국영 영화 제작소로, 그 안에 생활 조건이 다 갖춰져 있을 정도로 거대한 곳이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거의 폐허로 변한 상태였다. 예전 중국의 사회주의 영화가 번영하던 시절에 활발하게 운영됐지만 시장 경제가 들어오면서 점차 몰락했다. 그 공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책임자에게 여기 너무 아름답다고,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철거가 예정되어 있다길래, 그럼 한 달만 더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고는 바로, 갑자기 찍게 된 영화가 〈춘슈〉다. 시나리오도 없었고 시놉시스 같은 것만 가지고 막 정신없이 촬영했다. 그곳에 주차장 만든다는 걸 잠시만 멈춰 달라고 설득하고 그러면서 23일 동안 찍었다. 너무 힘들더라. 그래서 쓰촨성의 불교 명산으로 불리는 어메이산이라는 곳에 쉬러 갔는데, 그 산 아래 루오무라는 작은 마을을 보고 또 놀란 거다. 주변을 산책하다가 만난 사람들에게 그곳도 금방 개발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장소에 매혹되어서 또 영화를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춘슈〉 배우들에게 연락하니, 남자 배우만 다른 영화 일로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그는 목소리만 등장시키게 되었다. 〈춘슈〉 의상도 다 그대로 가져가서 촬영했다. 〈루오무의 황혼〉은 5일 정도 찍었다.

 

쇠락한 영화 제작소에서 느낀 아름다움의 정체에 대해서 더 듣고 싶다. 

폐허는 솔직히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유독 그곳이 특별하게 느껴졌다면, 영화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은 입장에서 그 풍경에 마음이 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많은 중국 영화가 탄생한 곳, 그 시대에 인정받은 혁명 영화들이 만들어진 곳, 배우들로 북적이던 곳이 이제 텅 빈 폐허가 되었다. 그 시절 사람들의 열정과 청춘이 묻힌 곳이라는 생각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두 영화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배우 중, 바이(〈루오무의 황혼〉)와 춘슈(〈춘슈〉)로 분한 바이바이허, 리우(〈루오무의 황혼〉)와 메이(〈춘슈〉)를 연기한 류단이 인상적이다. 영화 안에서 이들은 서로의 거울상 같기도 하다. 두 배우의 어떤 점에 호기심을 느껴 캐스팅했을지 궁금하다. 

류단은 전작 〈백탑지광〉에 잠시 나왔던 배우다. 나이도 좀 있고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춘슈〉를 찍으려는데 메이 역으로 그가 떠올랐다. 완전히 옛날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즘 세대도 아닌데, 뭔가 구시대를 견지하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중국에서는 1949년에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모든 영화가 표준어를 써야 했다. 극 중 배우인 메이는 바로 그 표준어 원칙을 고수하는 인물인 거다. 

춘슈를 연기한 바이바이허는 상업 영화에서 유명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그 나이대 배우들을 몇 명 만나보다가 캐스팅했다. 그런데 문제는 〈춘슈〉 배경이 청두인데, 이 배우가 산둥 출신이라 청두말을 할 줄 모른다는 거였다. 그가 청두말을 배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고 걱정하길래, 언어를 모른다는 설정을 그대로 가져가면 된다고 했다. 우리 현장은 공간이 다 결정된 상태에서 진행된다고 해도 기존 상업 영화 작업 방식과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다행히 바이바이허는 처음 하는 경험에 호기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배우들과 함께 리듬과 동선을 찾아 가면서 찍었다.

 

〈춘슈〉에서 만다린어와 청두 사투리를 화두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단지 지역적 차이가 아니라, 문화, 계급, 제도, 역사 등과 연계된 문제의식으로 보인다. 당신은 한동안 한국에서 한국어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누구보다 언어의 뿌리, 언어의 감각에 예민한 감독으로서 〈춘슈〉를 만들 때 이와 관련해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듣고 싶다. 

그러고 보면 대체로 내 영화는 언어와 관계된 세계였던 것 같다. 언어는 권력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사회에 큰 힘을 휘두르는 세력이 나타나면 국가 정책을 언어로 밀어붙이며 자기 기반을 넓히려고 한다. 지방 언어, 소수 민족 언어가 아닌 표준어 하나로 말이다. 다수가 빠르게 같은 언어를 터득하면 사회가 발전한다는 생각인데, 그 과정에서 손실이 생긴다. 언어와 연관된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맥락들, 그리고 구체적인 생동감 같은 것. 예를 들어 상하이 사람들이 표준어를 쓸 때와 상하이말을 쓸 때 신기하게도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지방마다 말의 표정은 다 다른 건데 표준어는 그 차이를 똑같이 만든다. 지금 중국 젊은 세대 중에는 고향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그냥 한 사람의 비극이 아니라 문화 전체의 비극이다. 내 영화에서 지역 언어가 나올 때, 나는 배우들이 모르는 말을 연기하도록 하지 않는다. 무조건 그 지방 출신의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한다. 〈춘슈〉에서 메이를 돌보는 여인이 그 예다.

 

두 영화에서 인물들은 낯선 장소를 걷고 또 걷는다. 그들의 걸음이 영화의 고유한 리듬을 생성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나이가 들면 산책하기를 좋아하게 된다. 나도 그러한데, 걷는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걷는 곳이 주는 느낌이 중요한 것 같다. 어디를 걷는다고 하면 그 과정에서 공간의 변화가 보이고, 또 길을 따라가다가 새로운 걸 마주하기도 한다. 〈루오무의 황혼〉에서 바이와 리우가 강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노인 하나가 강을 건너오는 장면이 있다. 리우는 그 강에 원래 다리가 있었는데 홍수에 사라져 버렸다고 알려 준다. 촬영 전, 나도 그 다리를 건넜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홍수가 났고 그 사실을 영화에 그대로 반영했다. 후반에 바이가 발을 물에 담그며 다시 그 강을 혼자 건너는 대목을 지나면 어느 마을에서 누군가 바이올린 연주를 하지 않나. 북한 영화 〈꽃 파는 처녀〉에 나오는 음악인데,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선율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중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 순간 일어난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두 영화는 인물들이 잠자는 모습을 유독 유심히 들여다본다. ‘나’가 ‘나’를 바라보는 기이한 설정의 장면들도 나온다. 〈루오무의 황혼〉에서는 남자의 유령 같은 음성도 바이를 맴돈다. 두 작품 모두에는 어딘지 몽환적인 기운과 접속한 순간들이 있다. 

잠이 든 사람들을 볼 때면, 깨어 있을 때의 상태로부터 무장 해제 된 존재를 보는 기분이 든다. 잠자는 사람의 얼굴에서 왠지 위로를 받는다. 그런 느낌이 반영된 장면들일 것이다. 〈루오무의 황혼〉이야 남자 배우가 출연할 수 있었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 같고. 〈춘슈〉의 경우 그 배경인 쇠락한 영화 제작소는 예전의 격정이 없어지고 흔적만 남은 곳인데, 다 사라진 것 같아도 여전히 유령들이 떠도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춘슈〉의 몽환적인 기운은 그 점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특히 이 작품은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라는 게 자신을, 무언가를 투영하는 세계이지 않나. 두 영화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장면의 설정은, 영화가 결국 자신과 마주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춘슈〉의 고양이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양이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양이의 시점 숏으로 불릴 만한 카메라 움직임은 당신의 영화에서 정말 낯선 것이다. 어떻게 구상하게 된 장면들인가.

〈백탑지광〉에도 고양이가 나오는데, 〈춘슈〉 조감독이 이번에도 나오면 좋겠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좋아하기도 하고, 요즘은 혼자 사는 이들이 많이 키우는데 고양이가 없으면 뭔가 허전한 느낌이라고. 그 말이 좀 재밌었다. 이 영화에서 춘슈는 고향을 떠나 베이징에 와 있고, 동거하는 남자 친구는 결혼할 생각도 없고 일도 잘 안 풀린다. 그러니까 춘슈는 그냥 계속 혼자 사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외로운 거다. 춘슈에게 베이징과 관련해 일말의 미련이 남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곳에서 함께 산 고양이에 대한 마음이 아닐까 해서 고양이를 데려간다는 설정을 넣게 되었다. 그런데 베이징 집 장면에서 그냥 고양이를 찍으려니 뭔가 밋밋하고 촬영 각도도 잘 나오지 않더라. 고양이가 등장하는 장면의 전체 감정을 어떻게 가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 고양이의 시점을 넣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 훈련이 된 고양이도 아니고 훈련할 시간도 없어서 찍는 데 애를 좀 먹었지만. 지금은 조감독이 키우고 있다.

 

두 작품의 엔딩은 영화 전반의 흐름에서 돌연 다른 방향과 결로 전환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 엔딩들은 어떤 고심 혹은 직관의 결과인가.

〈춘슈〉에도 나오듯 사회주의 영화를 향한 관심은 한때 온도가 막 올라갔다가 차가워졌다. 열정은 식는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춘슈를 정말 다정하게 대했었는데, 엔딩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차차 식는 거지. 사실 처음에는 춘슈가 임신하는 데서 끝내려고도 했는데, 미술 감독이 찾아와서 그렇게 해피 엔딩처럼 마무리하면 사람들이 실망할 거다, 감독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나, 그러더라.(웃음) 〈루오무의 황혼〉에서도 바이가 연인이 있다는 산으로 올라가 어느 절 문 앞까지 가서 마무리해도 되었겠지만, 그건 좀 재미가 없는 것 같았다. 바이는 알코올 의존자다. 알코올 의존자 중에 끝까지 술 마시다가 죽겠다는 사람은 없다. 나는 이겨 낼 거다 하고 말하지. 하지만 그게 또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물론, 바이가 산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다시 돌아가자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되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