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변영주 감독은 2000년 열렸던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당시 영화제의 제안으로 한국 영화사의 유실된 필름의 역사를 발굴한 다큐멘터리 〈지역 영화사: 전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 그는 ‘낮은 목소리’ 3부작을 통해 한국사가 외면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알렸다. 지나간 시대와 동시대 사이를 단절한 날카롭고 거친 틈을 단단하게 이어 붙인 변영주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뜨거운 아키비스트이자 냉철한 리얼리스트이다. 세대와 역사, 공동체와 기억을 영화로 이어 온 그는 올해 전주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청년의 바다〉, 〈낮은 목소리 2〉, 〈화차〉, 〈내일을 위한 시간〉, 다섯 편의 영화를 고유한 시선으로 촘촘하게 연결했다.
이번 프로그래밍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무엇인가? 2026년에 이 다섯 영화를 극장에서 다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라비아의 로렌스〉, 〈내일을 위한 시간〉, 그리고 〈청년의 바다〉는 어느 작품이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함께 떠올렸다. 이 일과 관련해 문석 프로그래머와 처음 만났을 때 바로 세 작품을 제안했다.
키워드로 이야기한다면 ‘기억’과 ‘바로 지금’이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를 만들던 1950년대 전주 영화인들을 기억하며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선정했다. 여기엔 바로 지금, 중동 역사의 어떤 시발점을 찾아보겠다는 의지 또한 담겨 있다. 〈청년의 바다〉는 내 영화의 시작인 다큐멘터리의 원점을 생각해 보는 뜻으로 선정했고, 내용 면에서도 ‘바로 지금’의 의미가 여전히 유효한 작품이라고 본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내게 있어 21세기에 영화를 만들면서 언제나 숙고하고 잊지 말아야 할 세상에 대한 태도에 관한 작품이다.
그 밖에는 내가 사랑했던 단편영화들을 묶어 상영하면 어떨까도 싶었다. 이경미 감독의 〈잘돼 가? 무엇이든〉, 장재현 감독의 〈12번째 보조 사제〉, 윤종찬 감독의 〈풍경〉, 그리고 박지윤 감독의 〈어느새 부는 바람〉을 떠올렸다.
‘낮은 목소리’ 3부작 중 〈낮은 목소리 2〉를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하다.
〈청년의 바다〉에 가장 어울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청년의 바다〉를 여러 차례 언급하셨다. 이 작품이 감독님에게 남긴 영화적 경험은 무엇이었나?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1993년이었던 것 같다. 오가와 신스케 감독님을 그의 도쿄 사무실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당시 감독님은 촬영용 동시 녹음 장비가 없어 일반 테이프 녹음기로 싱크도 맞지 않는 현장 사운드를 녹음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카메라도 소리가 큰 구형이었다. 그때 감독님은 〈청년의 바다〉를 예로 들며, 여건이 열악함에도 “무엇을 어떻게 찍을지, 결국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완성될 수 있었다”라고 말해 줬다. 그 말이 큰 의미로 남았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에는 우물물을 차지하려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어쩌면 다섯 영화의 주인공들은 해갈되지 않는 갈증 속에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 듯 보이기도 한다.
아라비아의 부족에게는 모두 각자의 시작점 같은 우물이 있다. 이는 타 부족에게 절대적으로 배타적이고 신성한 공간이다. 우물물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이용하는 것조차 허락받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현재 중동의 국경선과 국가 들은, 강대국들이 수많은 부족의 역사를 무시한 채 자기 이익만을 고려해 만들고 수정한 것이다. 애초에 한 공동체가 될 수 없는 이들을 억지로 묶어 놓고 그 결과를 문제시 삼는 서구의 시선을 지금 관점에서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섯 영화에서 모두 집단에서 개인으로 옮겨 가는 서사와 프레이밍의 도식이 감지된다. 등장인물들은 의지와 달리 공동체 속에 조화롭게 머무르지 못하고 추출된 후 방출된다. 〈화차〉의 엔딩 시퀀스에서 경선의 경로가 그렇다. 〈낮은 목소리 2〉의 할머니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룬 듯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자의라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종의 타의로 결성되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산드라는 노동 공동체에 다시 들어가려 하지만 결국 홀로 그곳을 빠져나온다.
〈화차〉의 경선은 처음부터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잠시 믿어 봤지만 결국 그것이 애초에 불가능했음을 깨닫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낮은 목소리 2〉는 새롭게 만들어진 공동체와 그 안에서의 생활 덕에 할머니들이 이전과 다른 삶을 사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산드라가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번제물 삼아 공동체를 지킴으로써 내적으로 다시 공동체를 구원하는 이야기라고 본다. 모두 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공동체 혹은 모두를 위한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에 관한 영화들이다. 여기서 〈화차〉만이 쫓겨난 카인이 복수에 실패하며 자신을 다시 밖으로 보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낮은 목소리 2〉에서 할머니들은 농사일을 계속한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 “나쁘지 않게,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참다운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라고 말하는데, 이는 복직의 대가로 계약직을 해고해야 한다는 사장의 제안을 거부하고 나오는 산드라의 가벼운 발걸음과도 조응한다. 〈청년의 바다〉 속 인물들의 낙관적 태도 또한 포함해 다섯 영화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숭고한 결정이 발견된다. 이를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리얼리즘으로 봐도 될까?
숭고함이라는 단어가 지닌 무거움은 조금 뒤로 보내고 싶다. 나의 관심은 단지 어떤 순간에, 그럼에도 한 걸음을 내딛기로 한 인간의 결의에 있다. 그것이 언제나 내 작품의 화두이다.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때 다큐멘터리 〈지역 영화사: 전주〉를 만드셨고, 26년이 지난 올해에는 프로그래머로 참여하신다. 영화제의 역사와 더불어 감독님의 지난 시간을 회상해 보셨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다. 다만 2000년은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끝내고 양쪽 눈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라 직접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촬영하는 일이 쉽지가 않아진 시기였다. 뷰파인더의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심스레 극영화를 고려하기 시작했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작업하게 되리라는 점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많이 했다.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밀애〉를 만드는 것이었다.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때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명확하다. ‘어떤 것이 나를 더 들뜨게 하는가’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감독 데이비드 린David LEAN | United Kingdom, United States | 1962 | 227 min | Fiction |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J Special: Programmer of the Year

청년의 바다Sea of Youth
감독 오가와 신스케OGAWA Shinsuke | Japan | 1966 | 56 min | Documentary |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J Special: Programmer of the Year

낮은 목소리 2Habitual Sadness 2
감독 변영주BYUN Young-joo | Korea | 1997 | 71 min | Documentary |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J Special: Programmer of the Year

내일을 위한 시간Two Days, One Night
감독 장피에르 다르덴Jean-Pierre DARDENNE, 뤼크 다르덴Luc DARDENNE | Belgium, France, Italy | 2014 | 96 min | Fiction |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J Special: Programmer of the Year

화차Helpless
감독 변영주BYUN Young-joo | Korea | 2012 | 117 min | Fiction |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J Special: Programmer of the Yea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