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된 화면과 넘치는 말 사이로 형언하기 힘든 공기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유형준 감독의 〈우리와 상관없이〉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기억을 잃은 배우가 자신의 영화 작업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따라간다. 장편 데뷔작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유형준 감독은 월드 프리미어 시사 직후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이었으면 했다. 살아 움직이는 입방체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진심을 전했다. 그 말 그대로 〈우리와 상관없이〉는 그날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하나로 결론 지어지는 영화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말과 말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로 의미가 파도처럼 이리저리 튕기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프리즘 같은 영화다. 유형준 감독에게 영화라는 이름의 이 흥미로운 미로를 탐험하기 위한 약간의 가이드를 부탁했다.


첫 장편 데뷔작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에 초청되었다.

얼떨떨할 뿐이다. 응원해주고 도와주는 모든 이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고 부지런히 움직이려고 한다.

 

2021년에 1부를, 9개월 후에 2부를 찍었다.

첫 장편은 만들어야겠는데 당시 현실적인 조건이 매우 열악했다. 초저예산으로 5회차 안에서 제작한 영화였기에 현실적인 조건들이 알아서 대략적인 틀을 만들어줬던 것 같다.

 

2막 구조가 눈에 띈다. 1부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기억을 잃은 배우 화령이 등장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2부에서는 각 인물들이 같은 영화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같은 상황, 다른 기억이라는 점이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온 뒤 나누는 대화처럼 느껴지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은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모양을 바꾸는 입방체 같은 것을 만들어보자는 거였다. 그 입방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모습일수록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나 여러 가지 코드 등은 그걸 구현하는데 쓰이는 재료였다. 1부를 쓸 당시 가족이 아팠고, 그런 영향 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과 마음들을 일부러 무책임하고 빠르게 썼다. 1부를 완성한 후 내 판단력에 대해 어딘가 의심이 생겨 9개월 정도 내버려뒀다. 그렇게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서 인공적인 시도나 구상들이 더더욱 많이 휘발됐다. 어떤 형태로든 완결되거나 말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차 줄어들었던 것 같다. 결국 조금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걸 즐기려고 노력하면서 감이 오는 대로 쓰고 찍었다. 1부를 만들 때보다 훨씬 개인적으로는 편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기다려주신 배우분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각본, 촬영, 편집, 음악까지 거의 1인 작업에 가까운 작업이다

제작비 탓이 절대적이었다. 빠른 작업이 가능하고 내 판단들을 설명하는 과정이 생략된다는 건 장점이었지만 아무래도 손이 많이 부족했기에 쉽지 않았다.

 

배우의 이미지와 캐릭터의 특색이 절묘하게 밀착되어 있다. 캐스팅의 기준이 있었나.

현실적인 조건들 때문에 사전에 인물 디자인을 최대한 비워놓고 작업했다. 성별, 연령대 등의 최소한의 제한만 정한 채로 캐스팅을 진행했다. 내게 자극을 주고,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배우가 의욕을 가지고 소화하실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우선이었다.

 

반복과 변주를 통해 미세한 차이가 드러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가운데 관객에게 조각을 조립하도록 허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복과 변주나 미세한 차이 등의 개념 등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극영화가 작동되는 방식은 대부분 정보가 누적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을 활용하자는 생각은 있었다. ‘잘 통제된’ 정보의 누적은 우리에게 특정한 세계가 실제로 있다고 믿도록 몰고간다. 우리 머리의 이러한 메커니즘이 지겨우면서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는 살면서 답과 거짓, 진실과 허구등 이분법적인 문제보다는 각자 나름대로 만들어온 ‘특정한 세계관’ 아래 훨씬 영향을 크게 받는 것 같다. 그 ‘특정한 세계관’이 계속해서 진동하는 체험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우리의 머리가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거부하며, 어떻게 상이 떠오르고 어떻게 사라지는지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렌더링해보고 싶었다.

 

인사동 골목길, 흑백의 미니멀한 화면, 롱테이크와 인물들 사이를 꽉 메운 대화, 차이와 반복의 구성까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비교된다면 영광일 뿐이다. 영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이 있는 편은 아니다. 학생 땐 루이스 부뉴엘과 마이클 스노우, 로스 맥켈위의 작품을 많이 좋아했다. 요즘은 영화를 더 안보는 편이고, 이 작품을 만들 당시에는 영화보다는 시트콤과 축구 경기를 많이 보며 자극을 받았다.

 

오프닝에서 인사동 골목길을 걸어가는 컷을 여러 차례 찍는다. 그 동선이 마치 미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패닝숏이 주는 느낌에 관심이 많고, 좋아한다. 스스로도 패닝숏이 주는 감흥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그런 몽타주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 밖에도 재미있는 숏이 많다. 인물을 등장시키기 전에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먼저 찍거나 내내 롱숏으로 인물들을 잡던 영화가 최성원 배우가 나올 때 불쑥 클로즈업된 얼굴이 나오기도 한다.

골목길을 찍은 건 영화라는 매체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떠들고, 움직이는 게 피곤할 때가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최성원 배우의 클로즈업은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여러 가지 옵션이 있었다. 대사를 하거나, 휘파람을 부는 등의 옵션도 있었는데, 현장에서 보니 그냥 말없이 바라보는 얼굴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때때로 영화 속 이야기는 목적이나 결과 아닌 과정에 따른 부산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와 상관없이〉에서 표현하고자 했던이야기란 어떤 것일까.

이야기는 때론 조각들을 모아주는 접착제가 될 수도 있고, 세계에 대한 이해로 몰고 나가는 잘 설계된 롤러코스터가 될 수도 있다. 두 가지를 모두 겸할 수도 있겠다. 그때그때 맞는 용도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항상 이야기를 대상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대부분 우리가 이야기를 해석하는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야기가 우리보다 상위의 주인이 될 수도 있겠다고 느낀다.

 

부러운 건 죄잖아요같은 대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인물들이 쏟아내는 수많은 말들이 때론 깊숙이 와닿고 때론 맴돌다 사라지기도 한다. 가령다들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몰라는 대사가 진심처럼 느껴진다. 이런 대사는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는지.

사실 일상 속에선 다들 자주 쓰는 말과 표현만 돌려쓰며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매일매일 자신의 자주 쓰는 말들을 업데이트하는 것도 이상한 행위처럼 느껴지고. 그런 답답함이 있다 보니 시나리오를 쓸 때는 기억과 생각 끝에 뭐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싶다.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된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흥미롭고 복잡하게 작동하는 기계 장치인데, 가끔은 영혼도 다녀가는 기계 장치.

유형준 Heong-jun YOO

1993년 서울 출생.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첫 장편 〈우리와 상관없이〉(2023)는 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상영되었으며, 베를린 GWFF 첫장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