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사피아의 장편 데뷔작 〈그리고 안개〉는 무료해 보이는 일상을 벗어나 자기만의 소박하고 고요한 여정에 오르는 세자르라는 한 남자의 진중한 이야기이다. 그의 여행길은 자연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자연 속에 머문다는 점에서 목가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애써 외면해 온 지난 시간과 마주하며 소란스럽지 않은 애도의 시간과 마주할 것이다. 내면의 방랑과 유랑의 영화는 저만의 속도로 천천히 나아가 인물의 심중을 헤집고 끝내 초연해질 것이다.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않고 곁을 내주지 않는 세자르라는 고독한 남성의 자기 성찰적 여정을 다룬 영화다. 어떤 계기로 이 영화를 준비하고 시작하게 됐나.

첫 아이디어는 여행이라는 개념과 이어진다. 실제로 내가 외국에 살 때 떠올린 생각이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안정적이라거나 뭔가가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란 단지 스쳐 지나가는 시간 같았다. 그래서 늘 귀향에 대한 생각을 품고 살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마음이 이국에서의 낯선 시간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또한 그 당시의 나는 ‘거리’라는 개념을 킬로미터나 미터로 생각한 게 아니라, ‘그립고 안전한 장소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으로 이해하곤 했다. 여행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후 매우 개인적이고 감정적으로 강렬한, 고향에 대한 갈망을 탐구하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였다.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써 ‘걷기’와 ‘방랑’을 다룬 글들을 접했고 그 내용들이 크게 와닿았다. 그러한 탐구를 거치면서 여행을 넘어서는 애도, 인생의 두 번째 기회와 같은 주제, 서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화학 공장은 시끄럽지만 삭막하고, 분주하긴 하지만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으로 그려진다. 세자르는 이곳에서 20년간 일해 왔고 늘 혼자 있었던 듯하다. 창문은 열려 있지만 어딘지 폐쇄적인 공장과 달리, 그가 길을 떠나면서부터는 시각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크게 환기가 된다.

그에게 공장은 일종의 피난처에 가깝다.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껍질과 같은 곳이랄까. 그와 동시에 세자르의 개인 차원에서 보자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곳은 그에게 점점 더 위험한 장소이자 위협적인 곳이 될 것이다. 계속 그곳에 머무른다는 건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공장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세자르의 유령 같은 걸음걸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첫 장면이야말로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난다.

 

여동생의 편지가 세자르를 떠나게 만드는 중대한 모티브가 된다. 공장을 떠남으로써 즉, 길을 나섬으로써 그는 묻어 뒀던 자신의 과거, 아픔과 상실, 사라지고 변화한 현실과 마주한다. 영화에서 편지가 어떤 힘으로 작동해 영화 혹은 세자르를 움직여 나가길 바랐나. 편지의 내용을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전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또한 묻고 싶다.

편지라는 소통 방식은 내가 생각하는 ‘여정’이라는 개념과 매우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전 작품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을 만큼 편지 방식은 탐구하고 싶은 형식이기도 하다. 일종의 하이브리드 장르랄까. 편지는 실험과 여담, 그리고 미처 말로는 언급되지 않은 것들까지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돼준다. 목소리로 등장한다는 건, 앞서 지속돼 오던 영화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깨뜨리고 서사의 궤적을 변화시키는 방편이 된다. 편지는 공장이라는 공간, 그 압력을 깨트리는 데 도움이 된다.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서 세자르의 가족사를 얼마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고, 이 가족의 과거사를 화면 외측에 둘 수도 있다. 편지는 세자르에 대한 단서를 나타내는 동시에 편지 덕분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감출 수도 있다.

 

영화에는 자연, 특히 산과 숲이라는 공간과 나무, 꽃, 풀에 관한 애정과 탐색이 강하게 느껴진다. 공간으로서 산과 숲은 많은 것이 급격히 변모하는 여타 세상과 달리 여전히 ‘본질적인 것’을 품고 있는 곳으로 보인다. 그런 대자연을 향한 애착과 노스탤지어가 느껴졌다. 동시에 자연은 관객이 미처 알지 못하는 상실, 고통, 그리움의 역사가 깃든 세자르의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 식물은 겉보기에는 작고 연약해 보여도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영화 속 자연, 식물의 세계가 세자르의 내면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길 바랐나.

나라는 사람은 자연주의자도 아니고 자연 속 삶에 대한 경험이 많은 편도 아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특히 팬데믹 이후로 자연을 더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 관한 아이디어는 팬데믹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었지만, 팬데믹으로 격리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이 가진 본질에 대해 더 강력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세자르라는 인물을 떠올렸을 때, 그는 자연이라는 이 무한한 세계에서 그가 필요로 하는 원동력을 찾는 듯하다. 그가 여정을 떠나는 데는 반드시 그의 존재를 이루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어쩌면 영화 초반에는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리고 길을 나서는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식물 삽화가의 관계가 점점 드러날수록,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모든 게 이해될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아는 세자르는 자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인물이다.

 

세자르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은 말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에 비해 공장 주변 소음, 이를테면 밤의 도심 소리, 개와 풀벌레 소리 등 앰비언스가 풍성하게 들어가 있어 공간과 인물의 감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사운드 디자이너로도 활동해 온 만큼 이번 영화에서 소리를 어떻게 설계할지 세심하게 계획했겠다.

동료인 아틸리오 산체스와 함께 사운드 작업에 정말 많은 공을 들였다. 특히 그는 현장 음향을 정리한 이후 그것을 가공하거나 샘플링을 만들고 리듬을 찾아내 가며 자연의 소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각각의 소리에 감정이 잘 담기길 시도했고 음악 역시 그런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침묵에서 굉음으로, 굉음에서 고요함으로. 공장 외부에서부터 넓은 들판까지, 사운드의 역학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기술에서는 좀 벗어나더라도 말이다. 공장의 섬뜩한 침묵이나 시골의 불확실한 침묵, 그 양쪽 모두 단순히 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침묵 그 자체로 뭔가를 말하고 전하길 바랐다.

 

사운드 만큼이나 영화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빛과 어둠의 활용과 대비가 인상적이다. 초반 공장 장면에서의 어둠, 밤거리의 어둠, 밤의 숲속 어둠과 불빛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듯하다.

영화의 형식에 관심이 많다. 적어도 서사와 어우러진다는 측면에서. 영화적 표현의 본질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과정은 정말 아름답다. 영화의 정보라는 게 텍스트가 아니라 빛과 소리로 전달되기를 바란다. 모든 면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지 않길 원했듯, 프레이밍이나 카메라 설정에서도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기교를 부리지 않으려 했다. 화면 비율도 4:3으로 설정해 풍경이 주인공이 아니라 또 하나의 인물이 되도록 했다. 웅장한 자연을 보면 소위 ‘예쁜’ 숏을 찍고 싶은 유혹이 크게 일기 마련이다. 그것을 경계하며 풍경 속의 인물이 아니라 인물 속에 있는 풍경을 담으려 했다. 촬영감독인 에세키엘 살리나스—내 생각에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빛과 그림자를 가장 잘 다루는 촬영감독이다—와 장면마다 빛을 고려해 가며 구체적인 촬영 시간대를 신중하게 잡아 나갔다. 세자르가 겪는 것들을 화면 안에 그대로 담아내야 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 밤 장면은 정말 중요하다. 세자르에게 밤이란 지난 20년 동안 가장 큰 은신처였고 그런 만큼 그러한 밤에 그의 내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24회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작품상을 받은 마리아 아파리시오의 〈구름에 대하여 About the Clouds(2022)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바로 그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배우 파블로 리마르시가 세자르를 연기했다. 〈그리고 안개〉는 세자르라는 한 사람에 관한 영화라고 해도 될 정도로 배우의 역량이 중요하다. 당신이 겪은 파블로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배우인가. 당신이 그리고자 한 세자르의 세계에 그의 어떤 면모가 흥미롭게 느껴져 함께하게 됐나.

파블로는 훌륭한 배우이자 나의 친구다. 마리아의 영화를 편집하면서 날것 그대로의 푸티지 속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내 신이 났다. 특히 그는 촬영 공간과 카메라에 대한 이해 능력이 뛰어난 ‘완성형 배우’다. 그의 이런 점은 현장의 내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줬다. 지금 어떤 렌즈를 쓰고 있는지, 자기 신체로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장면의 내적 리듬은 어떤지까지도 정확히 이해한다. 그런 지점은 촬영할 때 매우 중요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편집할 때 장면 하나의 내적 리듬이란 핵심적인 도구다. 그 리듬이 살아 있다면 편집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장면들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작업도 훨씬 수월해진다. 편집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종종 연출 의도에 어긋난다. 리듬을 찾기 위해 컷으로 문제를 덮어버리게 되니까. 파블로는 이번 작업에 정말 헌신적이었고, 그의 연기 덕분에 영화가 지금과 같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영화의 어떤 면에 좀 더 주목해서 본다면 이 영화의 진가를 더 잘 즐기고 감상할 수 있을까. 더불어 구상 중인 다음 작업도 귀띔해달라.

영화를 만든다는 건 내게 낯선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과 같다. 일종의 탐구 작업이다.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면서 나 역시 영화를 더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나 자신에게 더 나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영화가 나조차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곳으로 관객들을 데려가길 바란다. 저마다의 자의적인 방식으로 인물과 그의 여정에 공감하면 좋겠다. 현재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두 가지를 진행 중이다. 하나는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로 ‘이미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인 에우헤니아 알메이다의 책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형사물도 하나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