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롱크스 오차드 해변에서 여자들을 따라다니고, 직접 만든 칵테일을 팔며 생활하는 리코.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별다른 근심 걱정이 없던 그의 삶에 커다란 변수가 생긴다. 십 대인 그가 어쩌면 아버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리코는 과연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영화 시작에 뜨는 자막이 말해주듯 이 영화의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노동이다. 십 대지만 학교를 다니는 대신 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 리코는 어떻게 착안했나. 또한 리코의 일이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리코는 성장기에 내 주변에서 본 남자들, 주로 한부모 가정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온 카리스마 덩어리들을 녹여 낸 결과물이다. 남성성이 종종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된 브롱크스 같은 곳에서 ‘남자다워야’ 한다는 압박감과 어린 시절의 순진함 사이의 긴장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십 대 시절 부모가 된 내 부모님도 이 이야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국은 긍정적 남성 롤모델이 씨가 마른 환경에서 유색 인종 청년이 남성성을 탐색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난은 젊은이들이 준비도 되기 전에 성인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을 부여한다. 청년 남성들에게 성인으로서의 책임이란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한 채 남성다움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주로 이십 대에 “나를 찾아가는” 자유를 누리는 반면, 유색 인종 청년 남성은 이 통과의례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 현상이 초래하는 심오하고 지속적인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최근에 와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독특한 지점 중 하나는, 인물들이 공공시설이나 기관에 가는 모습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십 대의 임신이라는 소재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임신 중절과 같은 문제를 떠올리게 되고, 리코와 데스티니가 마주한 경제적 문제 등은 현실적으로는 은행, 복지센터 등과 같은 기관을 필요로 할 텐데, 영화에서 거의 강박적으로 이러한 기관의 장면들이 배제된다.

매우 흥미로운 관찰이다. 영화 속의 다른 많은 요소들처럼, 집과 그 근처 동네를 넘어서는 촬영 장소가 없는 건 우리가 가진 것이 적잖이 반영된 결과다. 더 넓고 다양한 공간에서 찍을 예산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사실 낙태 클리닉에서 한 장면을 촬영했다. 처음에는 임신 중단을 원하던 리코가 결국은 생각을 바꾸고 데스티니에게 임신을 지속하자고 애원하는, 매우 감동적인 순간을 그린 장면이다. 하지만 결국에 우리는 해당 장면을 파이널 컷에서 제외하는 쪽을 택했다. 관객들이 모든 이야기를 전달받기보다는 스토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감정적, 서사적 타래를 스스로 꿰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영화의 재미를 배가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싸움 장면이다.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발산하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과도한 무력을 쓰거나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로 확대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가 인물들에게 꽤 애정을 갖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요소의 많은 부분은 라티노 문화의 광범위한 측면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이런 요란한 다툼들은 고집이 아주 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직접적인 소통 방식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외부인에게는 거칠거나 심지어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 역학의 유래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그리고 이런 감정 폭발이 신체적 폭력으로 확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진정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런 장면들, 즉 부드러움과 차분함이 거의 순식간에 감정적 혼돈으로 변화할 수 있는 순간들을 영화에 담았다.

 

가장을 준비하는 리코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전제를 제외하면 서사에 뚜렷한 고저가 없다. 이는 사건의 잦은 생략, 급속한 편집과도 연관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음악 또한 흘러나오다가 장면의 단절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떤 것을 일부러 생략할 때 특별하게 두는 기준 같은 게 있나.

격의 없이 영화를 구성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고, 기존 영화의 문법인 명확한 인과 관계의 사슬로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의 구조적 지침은 관찰주의 영화(observational cinema), 극영화,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것들이었다. 울리히 자이델, 페드루 코스타의 작품과 모리스 피알라 영화의 들쭉날쭉한 날것의 리듬을 염두에 뒀다. 이질적인 순간들의 축적을 통해서만 의미가 나타나는 파편화된 비인과적 형태를.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다〉는 수동적 시청 경험을 위해 만든 영화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과 지역 사회에서의 그들의 삶을 깔끔하고 소화하기 쉬운 서사로 포장하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했다면 해로웠을 것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대개 가만히 정지해 있다. 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있던 곳에 인물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데, 이 무심한 고정성은 어떻게 채택되었나.

브루스 데이비드슨과 웨인 로런스 같은 사진작가들의 작품과 페드루 코스타의 〈뼈 Bones〉(1997) 같은 영화를 통해서도 영감을 얻었다. 나에게 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보존에 속하는 어떤 행위이기도 했다. 나는 이 커뮤니티의 모든 색채와 특수성을 포착하고 싶었다. 멈춰진 시간과 젊은이들의 시각을 통해, 그리고 급변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도시라는 배경막에 대비된 모습을. 미적으로, 또한 시각적으로 정적인 프레임과 움직임, 에너지, 감정적 변동성으로 가득 찬 미장센 사이의 긴장감에 관심이 있다. 이와 같은 대조는 리코와 고생하는 그의 가족이 경험하는 관성과 제한된 사회적 이동성에 대한 은유가 되었다.

 

원래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단편으로 공개됐던 작품이다. 장편으로 만들면서 중점적으로 보완하고자 한 요소는 무엇인가?

전형적으로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단편 그 자체로 자립이 가능한 작품을 만들거나, 수년 후 개발이나 제작될 수 있는 ‘검증용 영화’를 만드는 편이다. 우리의 경우, 장편을 먼저 찍은 다음 같은 자료를 발췌하여 단편을 만들었다. 펀딩 파트너 중 한 사람에게 단편을 제공해야 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 작업은 결국 장편의 성공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단편이 로카르노에서 초연돼 수상을 했고, 덕분에 다음 작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행히 그때 이미 장편은 거의 후반작업 단계였는데, 기본적으로 장편은 단편의 확장판이었다. 운때가 딱 맞아떨어진, 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운이 좋았다.

창작 과정 측면에서 단편을 확장해 장편으로 만드는 것은 비교적 간단했다. 그런데 공동 편집자인 이르판과 내가 장편 버전 작업에 속도를 내는 데는 사실 시간이 좀 걸렸다.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첫 장편 프로젝트였으며, 뉴욕에서 구해 온 자료가 장편의 서사를 유지하기에 충분할지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필요한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안도감이 들었다. 이 순간 덕분에 우리가 세상과 공유할 수 있는, 괜찮은 것을 갖고 있음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었고 계속 진행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남성성에 관한 우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말만 많던 남자가 종국에 침묵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을 것 같다.

유해한 남성성, 또는 라틴엑스(Latinx)1 커뮤니티에서 “마치스모(machismo)”2라 부르는 대상은 마치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다〉의 진정한 악역같이 느껴진다. 리코는 다면적이고 복잡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좋은 마음에서 바른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사회적 기대와 자신이 가진 왜곡된, “남자라면 이래야지”라는 생각을 충족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인물이니까. 비극적인 점은 리코에게는 유의미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의 여정을 탐색할 도구도, 지침도, 정서적 성숙함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내 개인적 경험, 특히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대부분 동안 내 곁에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버지적 존재(father figure) 없이 자라는 것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아버지적 존재의 부재가 어떻게 젊은 남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남성성을 형성하게 하는지, 또 그들에게 어떤 미심쩍은 영향을 남기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이벤트가 있다면 바로 어머니의 생일, 그리고 후반부의 성별 공개 파티다. 두 세리머니를 대비해 보여 주는데, 어떤 점을 염두에 둔 것인가.

지적한 대로 두 세리머니는 반사된 거울 이미지 역할을 하며 상반된 색채를 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축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리코 어머니의 생일은 고요한 절망에 잠겨 있다. 어머니의 쉴 새 없는 헌신과 희생, 가족을 위해 짊어져야 했던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집, 자식들, 안정감에 대한 통제를 잃어 가는 상황에 놓인다. 오늘날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 가정이 직면한 감정적·경제적 현실을 떠오르게 하는, 상징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장면이다. 반면 마지막의 성별 공개 파티는 상징적 리셋, 즉 희망이 다시 깨어나는 순간이 된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여전히 붙들기 어렵다. 이 영화의 세계에서는 보장되는 것이 없는데, 모순과 불확실성이 성장 경험의 근본적 요소와 진배없기 때문이다. 브롱크스 같은 곳에서는 실제로 그러하다. 

 

장편 데뷔작으로 많은 호평을 얻었다. 차기작을 귀띔해 줄 수 있나.

초기 개발 단계에 있는 몇몇 프로젝트가 있는데 뉴욕, 또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런던의 도미니카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관련된 프로젝트들이다. 현재로서는 이 정도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기 바란다.

 

 

 

  1. 미국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화나 인종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성별 중립적인 신조어.  
  2. 남자다움을 보이기 위해 여성을 힘을 제압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는, 왜곡된 남성성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