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공장의 전사들She
감독 파르시팔 레파라토Parsifal REPARATO | Italy, France | 2025 | 74 min | Documentary | 프론트라인Frontline
파르시팔 레파라토에게 영화는 단순한 기록 매체를 넘어 “사건과 관계, 이해를 촉발하는 촉매”로 기능한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론트라인 부문 상영작 〈그녀: 공장의 전사들〉(이하 〈그녀〉)은 베트남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 제품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로, 인류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그의 작업 세계를 집약한다. 타자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들 스스로 서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했던 레파라토는 자연스레 장 루슈Jean Rouch를 떠올린다. 시네마베리테의 개척자이자 영화를 통해 인류학의 지평을 넓힌 루슈가 말했듯 카메라는 몸의 연장이 될 수 있으며, 레파라토는 가능한 한 그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새로운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전자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베트남 여성 노동자들을 다룬 계기가 궁금하다. 첫 다큐멘터리 〈Nimble Fingers〉에서 〈그녀〉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이번 작업은 어떤 문제의식으로 출발했나.
어린 시절부터 정치·사회 운동에 참여하며 노동자 계급에 소속감을 느꼈고, 노동자의 시선이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임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구조적 불의를 이해하고 나아가 극복할 방법을 상상하려면 노동자의 지식이 필수라는 확신도 품게 됐다. 그러다 대학 졸업 후 미국계 전자 기업에서 일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공장 노동자는 아니었지만, 글로벌 생산과 착취가 어떻게 조직되고 작동하는지 목격했다. 그 경험은 ‘세계 전자 산업의 중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라는 질문을 불러왔고, 결국 베트남에서의 연구와 〈Nimble Fingers〉로 이어졌다. 〈그녀〉는 그 후의 장기 연구와 협업 속에서 확장된 작업이다. 나폴리대학교 ‘로리엔탈레’ 및 베트남사회과학원과 협력했고, 2020년에는 전자 제품 공장에서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얼마나 잘 대표하고 있는지,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시민 사회가 어떻게 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춘 EU 지원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개인적 궤적과 장기적 연구 모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추동됐다. 글로벌 생산 시스템은 노동자들의 삶, 신체,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러한 조건에서 인식과 저항은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
유럽 출신의 남성 학자이자 예술가로서 스스로 외부자의 위치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던 작업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치의 차이를 작업 초기에 어떻게 인식했고, 작업 과정에서는 어떤 질문을 던졌나.
내가 외부자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규정하진 않는다. 오히려 수적으로는 다수지만 주류 담론에서 배제된 노동자의 목소리에 형태를 부여하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글로벌 자본의 이익을 반영하는 서사에 익숙한데, 그 안에서 노동자의 경험은 쉽게 지워진다. 나는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서 바로 그 지점에서 사고하며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이 작업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노동자 및 연구자와의 공동 작업 속에서 발전했다. 이를테면 미켈라 체리멜레Michela Cerimele는 이탈리아와 아시아의 노동 문제에 관한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의 기초를 다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에트로 마시나Pietro Masina, 도타칸Do Ta Khanh을 비롯해 여러 연구자가 함께한 덕분에 질문을 발전해 나갈 공동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나를 이끌어 온 것은 거리감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조건이다. 노동자들이 겪는 부당함은 추상적, 외부적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베트남은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글로벌 자본주의 역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기술 발전과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수사가 노동자들의 몸과 삶을 기반으로 구축되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이는 베트남뿐 아니라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그리고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다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나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기보다 구조적으로 연결된 경험을 읽고자 했다. 이때 베트남은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읽어 내는 하나의 렌즈가 된다.
영화는 단순 취재로는 만들기 어려운 밀도를 지닌다. 촬영 이전에 참여자를 만나고, 출연을 설득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거쳤나.
이 영화는 단순 르포르타주와는 거리가 멀다. 나의 뿌리는 인류학에 있으며 영화 작업을 하기 전 언제나 인류학자로서 연구를 수행한다. 공동체로 깊이 들어가는 민족지적 접근을 취하는데, 그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프로젝트는 대학과 노조의 협업으로 시작됐고, 본래 노조 홍보 영상을 제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팬데믹 시기가 맞물리면서 베트남 박닌성에 머무는 기간이 애초 계획했던 3개월에서 7개월로 늘어났다. 그 7개월이 결정적이었다.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노동자 수백 명을 만났다. 처음에 그들은 나뿐만 아니라 베트남 연구자에게도 두려움을 드러냈다. 노동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두르지 않고 관계를 이어가며 신뢰를 쌓았다. 초반에는 조수인 프엉민응우옌Phuong Minh Nguyen과 함께 인터뷰와 관찰에 집중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려 애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여성 노동자들과 유대를 형성했고, 우리는 서로 다른 조건 속에 있더라도 같은 노동자 계급이라는 공통성을 점차 발견하게 됐다. 이 과정은 영화 형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익명성을 보장해야 했고 촬영 역시 제한된 조건 속에서 이루어졌다. 영화 속 모든 장면은 그들이 기꺼이 내준 신뢰에서 비롯했으며 노동 시간 외에 허락된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촬영이 이뤄졌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나 혼자 만든 결과물이 아니라 신뢰와 협업을 바탕으로 완성한 집단 작업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공장 내부 진입이 불가능했을뿐더러 인터뷰이의 이름과 얼굴 등을 공개하기도 어려웠다. 제약이 뚜렷한 상황에서 카메라는 여성들의 좁은 방과 사적 대화가 오가는 미용실 등 보다 내밀한 공간으로 들어선다.
공장 내부 촬영이 불가능한 상황은 익숙한 것이었고, 어차피 그 공간을 ‘몰래 보여 주는’ 데는 관심 없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통제하는 시선이 아니라 노동자의 관점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였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경험을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답은 그들이 체화한 지식에 있었다. ‘노동자들의 지식’에 관한 논의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데, 이번 사례에서 그 지식은 그들의 몸짓과 피로, 즉 신체에 새겨져 있었다. 영화는 손, 얼굴, 사소한 동작 등 디테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그런 요소들은 취약함, 강인함, 감정, 상처처럼 지극히 인간적인 무언가를 드러내고 우리가 그들과 구체적으로 연결되게끔 한다. 이러한 접근은 익명성을 보장해야 하는 조건과도 맞물려 보다 추상적이고 퍼포먼스적인 형식으로 이어졌다. 중심 공간으로 미용실을 택한 것은 연구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산업 단지 주변에는 미용실이나 소규모 스파가 무척 많다. 그곳들은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기 위해 선택하는 생계 공간이자, 잠시나마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을 회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장 내부에서 그들은 장시간 유니폼을 착용해야 하고 머리부터 손톱까지 일일이 관리당한다. 그와 달리 미용실에서는 돌봄과 친밀함, 일시적 자유가 가능하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공장이 아닌 빈 공간에서 노동을 ‘재연’하는 퍼포먼스다. 흑백 화면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를 세 개의 각도에서 촬영했는데, 마치 CCTV 화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은 어떻게 결정되었고, 무엇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하나?
노동자들이 자신을 더 명확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도구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적절한 무대는 상징적인 공간, 텅 비고 사방이 막힌 어두운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공장은 24시간 내내 조명이 켜져 있어 매우 밝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증언하는 것은 압박과 폐쇄성, 통제였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껴지는 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 공간에서 대본 없이 워크숍을 진행했다. 노동자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가린 채 현장에 왔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일상의 동작과 루틴을 수행했고, 그 결과가 영화 속 흑백 시퀀스로 나타났다. 중요한 전환은 ‘진실의 공간’을 도입하며 이뤄졌다. 그때 나는 참여자들에게 “이제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보여 준 장면을 되새겨도 좋고, 어떤 감정이든 표현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공장 내부 권력을 상징하는 ‘라인 리더’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마음대로 반응할 수 있었고 심지어 폭력적인 방식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은 복수를 실행하는 대신 존엄과 인정을 요구했다. 이 경험은 전체 작업 과정을 통틀어 핵심적인 가르침을 줬다.
감독이 인류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현장 조사와 관계 맺기, 그리고 그것을 영화로 번역하는 일에 어떤 차이를 느끼나? 학문적 기록과 영화적 재현 사이에서 긴 시간 동안 어떻게 관심사를 확장해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현장 조사는 무엇보다 관계를 쌓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한 연구 방법을 넘어 삶의 방식이 되기도 한다. 인류학에서 배운 중요한 사실은 완전한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환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민족지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중립성이 아니라 주관성이다. 관계를 만들고 신뢰를 형성하며, 경험을 통해 연결을 구축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시간이 흐르며 이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내가 이탈리아에 설립한 ‘Ethnographic Filmmaking Lab’을 통해 전달하려는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년 젊은 영화인들과 협업하며 그들이 민족지적 연구를 통해 프로젝트를 발전하도록 장려한다.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맺고, 실제 만남과 경험을 통해 이야기가 자라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 작업은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에 있다. 내게 영화는 그 너머로 나아갈 방법이 되어 줬다.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를 넘어 관계와 이해를 촉발하는 매체로서, 영화는 학문적 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아우른다. 영화를 통해서는 타자를 관찰하는 데서 나아가 그들이 서사에 참여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장 루슈가 말했듯 카메라는 신체의 연장이 될 수 있고, 현실을 증폭하며 관찰을 상호 발견의 과정으로 변형하는 일종의 보철 장치와도 같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작업은 현장 조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일부이자 또 다른 앎의 방식이다.
차기작 또한 공장 노동자를 다룰 예정이라고 들었다. 전작들과 어떻게 연결되는 작품인지 소개해 준다면.
분명한 점은 내가 임금 노동,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만드는 여정 속에서 나는 개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동시에 그 삶을 규정하는 구조를 탐색해 왔다. 최근에는 노동 조건뿐 아니라 일상의 표면 아래 존재하는 비가시적 영역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사유하도록 하는 데 있다. 내게 영화는 숨어 있는 구조, 즉 지배 질서를 지탱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을 가시화하는 한 방법이다. 전자 산업에 초점을 두는 이유는 이러한 역학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라서다. 따라서 각 영화는 분리된 작업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형성하는 조건을 이해하고 드러내려는 하나의 연속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