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민수는 캐리어를 끌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유학 생활이 잘 풀리지 않아 귀국한 후 고향 마을을 찾은 참이다. 집에 도착하자 낯선 중년 여성 홍미가 그를 맞이하고 얼떨결에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새로운 일상 속 풍경을 공들여 비추며 곳곳에 깃든 관계와 마음의 변화를 살핀다. 어떤 순간들은 봄이 다가온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입춘〉이라는 작품으로 찾아뵙게 된 최수빈이다.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이야기이며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입춘〉은 졸업 작품이다. 영화를 손에 쥐고 싶어서 영화 학교에 입학했는데, 졸업할 때쯤이 되니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던 시기에 나를 다독여 준 것은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동네 이웃들, 아르바이트 동료들, 우연히 마주하게 된 사람들이 어느새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처음에는 악재처럼 느껴지더라도 꼭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 그런 삶의 순리를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민수 또한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가운데 어쩌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는 낯선 인물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민수가 그 관계를 통해 조금씩 변화를 겪어 가기를 바랐다.

 

단순한 내러티브 안에 관계의 복잡미묘한 변화와 풍성한 감정이 담겨 있다. 이러한 표현을 위해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었는지.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민수는 힘들다는 말조차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인물이고, 고통을 토로하는 것조차 어떤 특권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전달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로케이션이었다. 내가 잘 알고 애정을 품은 장소의 공기와 시간을 최대한 담아 보고자 했다. 그 공간이 지닌 결을 통해 인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기를 바랐고, 로케이션 자체가 감정을 담아내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기를 기대했다.

 

로케이션에 관해 더 들어 보고 싶다. 영화는 강릉의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섭외 및 촬영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영화 속 배경인 강릉 복사꽃마을은 나의 외가가 있는 곳이다. 나 역시 민수처럼 인생의 공백기를 자주 겪었고, 그때마다 강릉에 가서 시간을 보내며 위로를 받곤 했다. 그곳에서 촬영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입춘〉은 졸업 작품이었기 때문에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많은 피드백을 받아야만 했고, 작업을 잠시 멈춰야 할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그때 일단 마을 섭외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땅콩캐러멜을 들고 마을 회관을 찾아갔다. 마을 어르신들께 둘러싸여 따뜻한 응원을 받았는데, 그렇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는 순간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 순간 덕분에 작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민수, 홍미, 현철, 강아지 구름이까지, 배우들의 집중력 있고 조화로운 연기가 극 전반에 힘을 부여한다고 느꼈다. 캐스팅과 디렉팅에 관해 들어 보고 싶다.  

배우가 본래 지닌 특성을 영화 안에 담고 싶었다. 민수를 연기한 이재리 배우는 학교 선배로 오랫동안 지켜봤고, 홍미 역의 안민영 배우와 현철 역의 전봉석 배우 역시 선배들의 작품을 통해 만나 온 터라 익숙했다. 기존 연기에서 보지 못했던 각자의 개인적인 결을 영화 안에서 드러내고 싶었고, 그 부분을 존중하면서 디렉팅하려고 노력했다. 구름이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큰 역할을 해주었다.

 

중년 여성이 바닥에 앉아 제철 식재료를 다듬는 모습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2025년 작 〈소풍〉에서 어머니가 바닥에 앉아 김밥을 싸시는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일상의 장면들을 공들여 담아낸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제가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일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삶이 언제나 큰 사건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일상을 지켜 내는 일이 가장 어렵기도 한 것 같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작은 울림이 생기고, 그것이 변화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에도 그런 일상의 순간들을 꾸준히 담고 싶었다.

 

2026년 봄, 영화 안팎으로 무엇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지.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삶은 아무리 계획해도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슬픔과 기쁨 모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비장해지지 않으려고 한다.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않게 살아 보려 한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앞으로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가?

지난겨울부터 특정 장소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다. 2025년 한 해, 어머니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소풍〉을 통해 인물을 들여다봤다면 이번에는 장소를 천천히 탐구하고 있다.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알 수 없지만 꾸준히 기록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고 느낀다.

또 앞으로 극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또래 친구들과 함께 작업해 보고 싶다. 어둠과 빛이 동시에 머무는 새벽에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견디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