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 미술가가 데뷔전을 앞두고 있다. 전시 준비를 배경으로 기획자, 갤러리 관장, 동료 예술가, 미대생이 등장해 저마다 욕망을 드러내 보인다. 로럴 벌랜트는 저서 『잔인한 낙관』 서두에서 말한다. “욕망하는 어떤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에 걸림돌이 될 때 바로 거기에 잔인한 낙관의 관계가 있다.”1 영화는 그 ‘걸림돌’을 직시하며 그것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한다. 답 없는 질문들 사이에서 찰나의 희망이 반짝인다.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6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첫 장편 다큐멘터리가 올해 초에 완성됐고, 첫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첫 극영화가 영화제에서 상영된다. 나도 자신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할지, 정의 내릴 필요가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 때에 맞는 옷을 때에 맞게 입는 사람으로 인식해 주면 좋겠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아가 큰 상태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시나리오 몇 편을 썼고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고 있다.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이야기인가?

이 이야기는 로런 벌랜트가 정의한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갈망하는 특정한 대상이 역설적으로 삶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되는 관계를 동시대 예술계의 풍경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다. 특히 ‘순수 미술’이라 불리는 영역은 사회적 인정(기성 미술계의 승인)이 생계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아이러니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에필로그에는 ‘환상’과 관련해 로럴 벌랜트의 『잔인한 낙관』 서론 발췌문을 인용했다. 해당 도서와 이번 영화의 관계에 대해 더 들려준다면.

에필로그에서 서론의 문구를 인용한 이유는 ‘환상’이 지닌 잔인한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어떤 대상(예를 들면 기성 미술계에서의 성공, 안정적인 삶의 궤도 등)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완성해 주리라는 환상 때문이다. 하지만 극 중 인물들이 보여 주듯,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굴욕이나 타협은 역설적으로 그들 자신을 더 소모하게 한다. 벌랜트가 말한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이 실제로는 당신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통찰을 영화적 서사로 풀어내려 노력했다.

책은 우리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우면서도 특정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못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나 역시 영화 속 성재나 소영처럼 예술가로서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낙관’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자문하게 됐다. 영화의 에필로그에 벌랜트의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배치한 건, 이 영화가 단순히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애착의 아이러니’에 관한 고백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영화적 장치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러한 실험적 시도와 관련해 어떤 의도와 고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작품의 가제였던 ‘피아골 리믹스’에서도 드러나듯, 고정된 서사 구조보다는 다양한 텍스트와 레이어를 ‘리믹스’하는 방식에 집중했다. 인물들이 실제 미술계에서 마주할 법한 상황을 연기하지만 그 안에서 다큐멘터리적 질감과 극영화적 장치를 충돌시키고자 했다. 이는 관객이 이 영화를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예술계의 현실을 감각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미술 작가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영화라는 매체가 예술을 담아내는 방식도 실험하고 싶었다. 스크린 속 텍스트, 유튜브 화면 인용, 그리고 실제와 연기가 뒤섞인 장면들을 통해 ‘무엇이 진짜 예술인가?’ 혹은 ‘무엇이 진실한 목소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번 작업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에 관해 더 자세히 들어 보고 싶다. 극 중 소영의 말을 빌리자면, “작품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었나?

소영은 갤러리 기획자이자 강사로서 미술계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동시에 ‘미술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이다. 그의 입을 빌려 던지고 싶었던 핵심 질문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믿으며 행하는 이 모든 활동이 진정으로 우리 삶을 구원하고 있는가?’이다. 단순히 전시를 열고 작품을 파는 행위를 넘어, 예술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묻고자 했다.

소영은 성재가 기성 미술계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을 브랜드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여기서 발생하는 질문은 ‘예술가의 진정성조차 하나의 전략으로 소비되는 구조 속에서, 과연 순수한 목소리는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소영이 느끼는 피로감과 회의는 바로 이 ‘진정성의 상품화’라는 모순에서 기인하며, 이는 관객들에게 우리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어떤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장치가 된다.

소영은 갤러리 일을 그만둘지 고민하면서도 결국은 시스템의 한 축으로서 업을 수행한다. 그를 통해 ‘부조리한 시스템을 비판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혜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의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 또한 던진다. 이는 영화의 주제인 ‘잔인한 낙관’과도 맞닿아 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구조에 의존해 생존해야만 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 혹은 그 안에서 어떤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는 소영의 시선을 통해 ‘우리를 지탱하는 그 낙관적인 환상을 걷어 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다. 에필로그에서 언급되는 벌랜트의 텍스트처럼, 애착 대상이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했을 때의 공포와 해방감을 동시에 보여 주고 싶었다. 영화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기보다 소영이 느끼는 그 막막한 질문들을 관객의 몫으로 남기며 끝을 맺는다.

 

전시 뒤풀이 자리, 한 예술가(퍼포머)가 펀딩과 생계, 작업과 자아 탐구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이야기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청년 창작자인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겪어 내고 있는지.

펀딩과 생계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인 어려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의 시간과 자아를 잠식하는 실존적인 위협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독립적인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작업을 이어 가는 과정에서 나 역시 작업에 몰입해야 할 에너지가 생존을 위한 활동으로 분산될 때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는 이 불균형을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창작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필연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기록’하고 ‘수행’하는 방식으로 겪어 내고 있다. 생계와 작업 사이의 갈등을 외면하는 대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로와 냉소, 그리고 일말의 희망을 작업의 핵심 소재로 끌어들인다. 이번 영화 〈잔인한 낙관〉 또한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시스템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나를 소진시키지만, 그 소진되는 감각을 영화적 장치로 치환했을 때 역설적으로 다시 작업을 지속할 힘을 얻는다.

창작자로서 자아를 지키는 것과 기성 시스템의 자원을 획득하는 것 사이에서 매 순간 저울질한다. 지원금이나 펀딩은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지만 창작자를 특정한 틀에 가두기도 한다. 나는 완전히 순수하거나 완전히 세속적인 어느 한쪽을 택하기보다, 시스템의 문법을 익히되 그 안에서 나만의 균열을 낼 수 있는 ‘영리한 거리 두기’를 연습하고 있다.

결국 청년 창작자로서 이 시기를 겪어 낸다는 것은, 정답이 없는 미로 속에서 계속 움직이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일이다. 때로는 저널리즘적 시선으로, 때로는 다큐멘터리적 질감으로 현실을 포착하며 내가 처한 상황을 객관화하려 노력한다. 나에게 생존의 고충은 극복 대상이라기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가장 치열하게 반응해야 할 ‘현장’ 그 자체다. 그 현장을 포기하지 않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문제를 통과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간 다큐멘터리 감독, 무빙 이미지 작가, 비디오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역할과 이름으로 작업을 펼쳐 왔다. 〈잔인한 낙관〉은 당신의 이력에서 어떤 의미를 띠는 작품인가?  

비디오 저널리스트로서 사회의 단면을 포착하던 감각과 다큐멘터리 연출가로서 진실의 층위를 탐구하던 시간들이 이 작품을 통해 하나의 ‘영화적 언어’로 응축되었다. 과거에는 사실을 전달하거나 현장을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 작품은 그 기록된 사실들을 해체하고 재구성remix하여 나만의 미학적 틀 안에서 동시대의 징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잔인한 낙관〉은 분절되어 있던 여러 활동이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을 확인시켜 준 작품이다.

이전 작업들이 주로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삶을 관찰하는 데 머물렀다면, 이 작품은 내가 발 딛고 있는 ‘예술계’와 ‘창작자’라는 위치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치열하게 응시한 결과물이다. 저널리스트적 객관성으로 현상을 분석하면서도 창작자로서 느끼는 실존적 고뇌를 극영화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는 타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나의 세계관과 문제의식을 주체적으로 선언하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다채로운 이력을 자양분 삼아 나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하기 시작한 첫 번째 챕터라고 생각한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쌓아 온 경험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 모든 파편을 모아 하나의 완성된 영화적 서사로 빚어냈다는 점에서 창작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잔인한 낙관〉은 단순히 하나의 필모그래피를 넘어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변하지 않을 나의 창작적 근육을 확인한 작업이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가?

올해 두 작품이 막 끝난 참이다. 하나가 〈잔인한 낙관〉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터〉라는 장편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다. 〈이스터〉는 해외에서 먼저 관객을 만날 것 같다. 작년(2025년)에는 이 두 작품 후반 작업을 하며 시나리오를 쓰는 데 몰두했다. 다음 작품으로 극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낙관’ 시리즈 3부작을 완성하고 싶은 생각이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은 아이돌과 소설가, 그리고 매거진 에디터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잔인한 낙관〉을 재밌게 본 분들이 있다면 과감히 투자를 해주시길 바란다. 그럼 만들어질 수 있다.

 

 

  1. 로럴 벌랜트, 『잔인한 낙관』, 박미선, 윤조원 옮김(후마니타스, 2024),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