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보낸 여름The Summer That Slipped Away
감독 이선연LEE Seonyeon | Korea | 2025 | 87 min | Fiction | 한국경쟁Korean Competition
무더운 여름, 한 가족이 빚에 쫓겨 봉고차에서 먹고 자며 떠돈다. 딸 유영, 어머니 현숙, 아버지 대환은 충남 일대 휴대폰 매장을 돌며 하청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 가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매장에 전달하기로 되어 있던 휴대폰 박스 하나가 사라지면서 위태로운 생활에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온다. 영화는 세 인물의 일상과 갈등을 비추며 그 안에 깃든 불안과 소외를 들여다본다. 길 위에서 폭염과 소나기를 겪으며 끊임없이 부유하는 사람들. 세차게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가 그들을 감싸는데, 귀를 기울여 보면 어려운 날들을 “잘 흘려보내 달라”는 응원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도 같다.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작년 여름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창작하고 있다. 〈흘려보낸 여름〉은 첫 장편 연출작이다.
어떻게 구상하게 된 이야기인가?
20대 중반, 부모님과 함께 지방의 휴대폰 매장을 돌며 하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승합차를 타고 한 팀이 되어 할당된 매장에 방문해 신제품을 위한 모크업을 교체하는 일이었다. 매일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날이 어두워 집에 돌아가야 했다. 당시 집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던 터라 많은 생각과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때 느낀 감정과 생각들의 잔상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영화 학교를 졸업하면서 첫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절실하게 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남은 그때의 일을, 가장 사랑하는 언어인 영화로 풀어내고 싶었다. 개인적인 경험에 상상력을 덧붙여 확장한 이야기다. 그런 시간을 통과 중인 이들, 같은 상황에 처한 누군가에게 그 시절이 지나갈 거라고, 부디 잘 흘려보내 달라고 응원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유영, 현숙, 대환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동’이라는 테마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다면?
세 사람에게는 발 내디딜 곳 하나 없이 봉고차가 유일한 생활 공간이자 집이다. 이들이 어딘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펼쳐진 세상에서 부유하고 있다는 감각이 중요했다. 이는 주거 문제와 더불어 각자가 지닌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 불안과 맞닿아 있다.
길 위에서 이들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제자리에서 맴돌거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고단함과 소외, 그리고 불안을 드러낸다.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가족이 어떻게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우리 사회가 개인과 가족의 삶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보살피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일이 노천에서 일어난다. 야외 촬영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기도 했을 듯한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매장에 전달했어야 할 박스를 잃어버린 뒤 세 사람이 대책 회의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촬영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졌다. 마음이 타들어 갔다. 비가 그치기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이들이 느끼는 허탈감과 허망한 정서가 비 내리는 풍경과 맞닿아 있다고 판단해 즉흥적으로 촬영했다. 인물의 감정과 현실의 환경이 자연스럽게 겹친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우연은 하나의 장면이 되었고, 인물의 공허함과 고독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영화는 이은하의 「조용한 미소」로 시작해 송창식의 「우리는」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서는 여름철 야외의 소리가 도드라진다. 음악과 사운드 사용에 관해 들려 달라.
공간이 지닌 소리를 통해 인물의 정서를 감싸안고 싶었다. 자연의 소리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정서적 배경이 된다. 여름날의 매미 소리, 강가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처럼 자연 공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배경처럼 흐르며 인물의 감정 상태에 스며든다. 특히 물소리는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정서의 지점이다. 계절을, 혹은 시절을 물에 흘려보내는 듯한 느낌을 주길 바랐다.
봉고차 안에서 들리는 거친 엔진음과 도로의 소리는 가족이 어디론가 계속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 이런 ‘이동의 사운드’는 관객을 인물들의 불안정한 여정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동하는 숏이 많아 이 영화만의 리듬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속 「조용한 미소」는 로드 무비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데 보탬이 됐다.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무겁게 가라앉는 분위기가 되지 않기를 바라, 빠른 템포의 음악이 필요했다. 초반부에서 배경처럼 들리던 음악이 가족이 듣는 카세트 플레이어의 소리로 이어진다. 엄마와 아빠가 차 안에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순간은, 인물들이 잠시나마 감정의 숨통을 틔우는 장면이다. 이 짧은 노래는 이들의 과거와 관계를 환기한다. 엔딩 크레디트에 흐르는 음악까지 영화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송창식의 「우리는」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 닿아 있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한 걸음 물러 나와 내가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소동극을 치르며 함께 또 각자 변화를 겪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가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우연히 만난 팀이라고 생각한다. 확률로 인해 가족이 되었지만 결국 한 팀이라는 운명으로 묶인 관계다. 그렇기에 각자의 모난 부분이 부딪히기도 하지만 ‘팀’이라는 둥근 면 안에서 서로를 감싸안고 그 모서리를 조금씩 깎아 가며 함께 굴러가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2026년 봄, 영화 안팎으로 무엇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지.
소설을 좋아한다. 천천히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복잡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한 권을 읽고 나면 삶의 해상도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20대를 지나 3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줄곧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해 왔다. 삶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마주할 때면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편이다.
최근 몇 년간 일어났던 일 중에 아직 내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 엉킨 감정의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 가는 중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좋다. 매일 루틴처럼 성실하게 써나가면 언젠가는 한 권의 소설로 완성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설 한 권의 물성이 손에 잡히는 순간, 그동안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던 삶의 한 부분도 비로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앞으로 영화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싶은가?
내가 만든 영화 속에서, 무너져 내린 누군가가 다시 일어나는 순간을 보고 싶다. 늘 외로운 사람들의 곁에 머무르며 ‘왜 무너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오래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인물들의 그 시간을 함께 통과해 보고 싶다.
더 섬세한 이미지를 포착하고 더 깊고 풍부한 사운드로 그 과정을 담아내는 것이 목표다. 첫 장편영화를 완성한 지금, 더 용기를 내 작업해 나가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