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gentina | 2022 | 100min | 월드시네마
아르헨티나 독립 제작사의 최전선 “엘팜페로 시네”의 일원, 무려 14시간 이상 펼쳐지는 영화 〈라 플로르〉(2018) 감독, 동시대 가장 급진적이며 도발적인 이야기꾼, 거침없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스크린을 누비는 탐험가. 마리아노 지나스가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그간 전주국제영화제는 〈기묘한 이야기들〉(2008), 〈라 플로르〉, 〈탱고가수 코르시니〉(2021) 등 지나스의 작품들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신작 다큐멘터리 〈클로린도 테스〉(2022)의 상영을 앞두고 이 영화를 추동하는 활기의 비밀을 물었다.
이 영화는 아르헨티나의 건축가 ‘클로린도 테스타’만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 훌리오 지나스, 그가 쓴 책 『클로린도 테스타』, 무엇보다 아르헨티나 역사를 가로지른다. 재단의 의뢰를 받아 시작된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영화의 방향성을 언제 어떻게 구체화했는가?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해 동안, 내겐 클로린도와 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 재단이 클로린도라는 인물이나 그의 업적에 흥미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그들이 이 작업을 내게 의뢰하도록 재단 구성원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고 인정해야겠다. 이 일을 위임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탱고가수 코르시니〉와 마찬가지로 〈클로린도 테스타〉는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작품에 그대로 반영한다. 그래서 영화에 예상치 못한 문들이 계속 열린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작업 방식에 어떤 매력을 느끼는가?
장편 〈라 플로르〉 작업 마지막 몇 해부터는 각본 없이 촬영하기 시작했다. 촬영 자체가 초고, 즉 시나리오 작업이었다. 그러니 편집은 재고의 과정이 되어, 끊임없이 영화 전체를 다시금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모든 영화를 코미디로 여겼기 때문에 편집 과정에서 어떻게 새로운 개그를 얻을지가 관건이었다.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편집실에 카메라를 두는 것이었고, 편집자가 촬영 오퍼레이터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새로운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런 방식은 옛 전통에 가깝기도 하다. 채플린도 초기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촬영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뒀다.
이 영화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인물의 궤적은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클로린도 테스타〉와 장르는 확연히 다르지만, 근래 당신은 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를 전면화한 〈아르헨티나, 1985〉(2022)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과거와 현재를 영화로 대면하는 문제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때 감독으로서 지키려는 원칙이나 태도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두 영화 사이에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은 조금 어렵다. 〈아르헨티나, 1985〉는 대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였음에도 나에게 중요했다고 생각하지만, 작가로만 참여한 작품이었다. 따라서 스타일, 분위기, 강조점 등에 관한 대부분의 결정은 내가 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클로린도 테스타〉에서 모든 결정은 내가 내렸다. 요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의 새로운 주제를 찾을 때 아르헨티나 역사는 나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역사를 영화로 만드는 방식은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고, 이전 작품들에서 픽션 자체에 할애했던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 내 작업의 방향성을 정의해야 한다면, 그 방식은 옛 서양식 관습인 심령주의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령들을 부르는 과학 혹은 기술 말이다. 이 영화에서 유령 중 한 명은 아버지라서 위험 부담이 좀 따르지만 나는 그를 동료에 가깝게 친근하게 대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아주 관대했다. 그러나 여전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나는 과거를 촬영할 수는 없지만, 유령을 촬영할 수는 (적어도 불러낼 수는)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다루는 법만 터득한다면, 나쁘지 않은 배우들이다.
〈클로린도 테스타〉는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안에서 우리는 훌리오 지나스의 사진, 그가 쓴 책의 문장들, 그에 관한 일간지 기사를 듣고 보지만 아버지에 대한 당신의 사적인 기억이 이 영화에 어떤 동력으로 작용했는지 좀 더 듣고 싶다.
쉽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오늘 밤 안에 인터뷰 질문에 답변해야 하는데, 이 주제에 대해서는 시간이 다하도록 글을 쓸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이 영화에 아버지를 들였다는 점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 문을 열었고, 이제 그는 거기 존재한다. 나는 마블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그들에게서 많은 묘책을 배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이 가끔 중요한 인물(또는 다음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캐릭터)을 마치 카메오처럼 비밀스럽게 공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누군가 중대한 인물이 나타났다”라고 여긴다. 이 영화에서 나는 아버지와 그렇게 했다고 느낀다. 엔딩크레딧 후에 “J.LL.은 돌아올 것이다”라는 문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장르 불문하고 당신의 영화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즐겨 사용한다. 그 음성은 단지 내용적 차원을 넘어서 이야기꾼이 생성하는 고유한 리듬, 기운, 표정처럼 체감되곤 한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가능성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흥미가 궁금하다.
그건 지식인, 교양인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아 오지 못한 특정 예술 형식, 노래에 대한 나의 존경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놀랍게도 노래는 태초부터 분명한 경계로 분리된 것들을 하나로 혼합한다. 내레이션과 음악, 내레이션과 시, 언어와 이미지, 빛과 깊이, 이야기와 소리, 음성과 소리,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자신감과 시끄러움, 더러움과 부드러움, 달콤함과 거침 등. 이 모든 까다로운 관계들이 노래라는 예술에 의해 더없이 행복하게 사라지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데 사용되는 인간의 목소리가 여기에서는 노래한다. 내가 영화 속 보이스오버에서 기대하는 바는 영화를 노래에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음악은 장면의 흐름을 단절하거나 잇거나 전환하는 적극적인 힘이다. 〈클로린도 테스타〉에서도 음악은 영화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 속 음악들에 당신의 어떤 기억이 투영되었는가. 혹은 영화를 찍으면서 이 곡들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두 종류의 음악이 나온다. 찰스 트레넷의 옛 노래와 늘 그렇듯 가브리엘 치우닉이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가 있다. 나는 치우닉이 현존하는 최고의 영화 음악가라고 생각한다. 내겐 특권이 있다. 우선 나는 원하는 모든 것을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치우닉과 가깝고, 그가 내 요구를 들어주리라는 확신이 있다. 또한 아마도 전 세계에서 나만이 그에 대해 이렇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의 평화를 방해할 다른 감독들과 그의 시간을 공유할 필요가 없다. 나의 음악가가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내 영화들을 그의 작품들로 채우려는 시도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필립 4세도 그의 벨라스케스에게 똑같이 하지 않았나?
당신의 상상력이 구축한 모험적인 형식 근간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유머가 있다고 느껴왔다. 이 영화에서도 유머는 세계만이 아니라 감독 자신을 응시하는 태도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러한 인상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그렇다. 나에게 유머는 윤리의 가장 높은 형태이며, 거의 종교적 실천이다. 유머의 결핍은, 내 생각에는, 악의 궁극적 얼굴이다.

마리아노 지나스 Mariano LLINÁS
1975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생. 엘 팜페로 시네(El Pampero Cine)에 참여하고 있다. 7편의 영화를 연출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라 플로르〉(2018)다. 각본가로도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