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석 프로그래머는 올해가 ‘코로나와 함께하는 마지막 영화제’가 되길 희망한다.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쟁 프로그램 ‘한국경쟁’ 및 ‘한국단편경쟁’,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한국영화를 조명하는 ‘코리안시네마’, 개성이 진한 장르영화를 소개하는 ‘불면의 밤’ 섹션을 담당하는 그에게 올해 프로그램의 경향과 매력에 대해 물었다.
올해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가장 고민이 되었던 부분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코로나 사태와 관련되는 사안이 가장 고민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시점까지도 오미크론 확산세가 정점에 다다르지 않은 상태라 영화제가 열릴 무렵 상황이 짐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힘든 대목이다. 그럼에도 해외 게스트들이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다시 예전처럼 많은 분들과 떠들썩하게 즐기는 축제의 장을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진심이다.
올해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선정작의 특징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족이라는 소재를 많이 다뤘다는 사실이다. 예년에도 주요 소재이긴 했지만, 이토록 많은 영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을 다룬 적은 없다. 속물적인 가족의 이야기나 부모를 바라보는 자녀의 이야기뿐 아니라 노년 부부의 이야기라든가 유사가족 또는 대안가족에 관한 작품도 많았다. 반면 지난해까지만 해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했 던 여성, 노동, 사회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지만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창작자들 또한 바깥 세계보다 스스로의 가까운 곳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장르적인 관심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화 또한 예상 이상으로 많이 출품됐다.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준 창작자 여러분께 경의의 마음을 전하면서도, 영화의 질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려가 된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 제반 환경이 개선되면 이 또한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코리안시네마’ 섹션의 경향도 그와 비슷한지 궁금하다.
그렇다. 가족 소재를 담은 영화가 많이 배치됐다. 특히 나문희, 이순재, 백일섭 같은 ‘실버 스타’ 배우들을 비롯해 방송이나 상업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여럿 포함되어 보다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실험성이 뛰어난 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도 배치되어 있다. 한편, 올해는 코리안시네마 섹션 안에 미니 특별전을 넣었다. 신수원 감독의 최신작 〈오마주〉를 중심으로 홍은원 감독의 1962년작 〈여판사〉까지 4편을 상영하는 ‘오마주: 신수원, 그리고 한국여성감독’이 그것이다. 한국 여성감독들의 삶을 돌아보고 이에 경의를 표하는 섹션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관객들의 반응이 기대되는 영화를 2편만 소개해달라.
우선 〈룸 쉐어링〉(이순성)은 한 청년과 함께 살아가게 된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넉넉한 품새로 그려내는 영화로, 나문희 배우의 매력이 잘 보이는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오마주〉(신수원)는 한 여성 영화감독이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를 복원하면서 스스로의 삶과 영화에 관해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정은 배우의 원숙한 연기가 돋보인다.
‘불면의 밤’ 섹션에는 어떤 영화들이 준비되어 있나?
〈라우더 댄 밤즈〉(2015)와 〈델마〉(2017) 등의 각본을 썼던 노르웨이 에실 보그트 감독의 〈이노센트〉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예측불허의 영화이며, 스페인 카를로타 페레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피기〉는 201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동명의 단편영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외에도 공포나 짜릿함과 동시에 영화적인 놀라움을 안겨주는 영화 6편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편,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6편의 감독 모두 국적이 다르다. 노르웨이, 스페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핀란드, 중국, 영국으로 그만큼 이야기의 색채가 다채로울 거란 말이다. 그중 4명이 여성이라는 사실도 특이하다.
특별전 ‘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은 어떤 배경에서 기획되었나.
지난해 프랑스 알랭 마자르 감독이 이창동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을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 계기 삼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세계를 돌아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다큐멘터리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과 이창동 감독의 최신 단편영화 〈심장소리〉를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며, 이 감독의 장편 6편 모두를 4K 화질로 상영할 예정이다. 세계 곳곳에서 이창동 감독에 대한 특별전은 여러 차례 개최되었지만 이처럼 장·단편 전작과 다큐멘터리까지 소개하는 행사는 이번 전주국제영화제가 최초다.
특별전 ‘충무로 전설의 명가 태흥영화사’에 대해서도 소개해달라.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태흥영화사의 창업자인 이태원 전 대표가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태흥영화사는 돈벌이가 되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한국영화를 만들던 시대에 진정 가치 있는 영화를 만들었던 대표적인 영화사였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태흥영화사의 업적은 〈비구니〉(1984)부터 〈하류인생〉(2004)까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줄곧 제작하면서 세계 영화계에 한국영화의 위상을 각인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두용, 이장호, 배창호 같은 당대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영화를 만들었고 이명세, 장선우, 김용태, 김홍준, 송능한 같은 새롭고 도전적인 감독의 영화 또한 만들어 한국영화에 새 물길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태흥영화사의 대표작 8편을 소개하는 이번 행사는 한국영화사에 남긴 이태원 전 대표와 태흥의 커다란 발자국을 기리기 위한 자리다.
올해 영화제에서 기대하는 점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코로나로부터 해방되는 영화제’ 또는 ‘코로나와 함께하는 마지막 영화제’로 만들고 싶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만으로 이뤄질 리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코로나의 그늘에서 벗어나 올해는 예전과 같은 축제의 장을 어느 정도 복원하고, 내년부터는 진정한 ‘정상화’를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바람을 가져본다.
Invitation Letter
코로나 사태 속에서 치러지는 세 번째 영화제를 맞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영화제의 꼴을 갖추고 행사를 만들어 나갔던 데는 첨단 정보통신 기술의 도움이 컸습니다. 온라인으로 상영도 하고 관객과의 대화 행사도 열었고 라이브 방송까지 하면서 영화제의 공기를 멀리 떨어진 관객들에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 두 해 동안 우리는 미래의 영화제를 미리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미래에도 영화제가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면 이런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먼저 살아본 미래는 헛헛하고 뭔가 모자라 보입니다. 해서, 올해부터는 전주국제영화제도 현재로 돌아오려 합니다. 완전한 모양새는 아니겠지만 수년 전까지 익숙하게 즐겼던 현재의 영화 축제를 재현하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낙관만 하는 건 아닙니다.
방역과 안전에 대한 준비는 철저하게 갖추고 있으니 부디 올봄 전주를 여러분의 숨결로 뜨겁게 해주십시오. 우리 함께 현재로 돌아가시죠.
Programmer’s Picks
Japan┃1997┃111min┃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올해의 프로그래머 연상호 감독이 선정한 영화 중 하나. 한때 한국에서 불법 CD와 DVD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이 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가장 대표적인 스릴러이자 현대 인간에 대한 섬세하고 날카로운 탐구이다. 지난 세기인 1997년에 만들어졌음에도 여전히 현재적인 이 영화는 한국 최초 4K 버전으로 상영된다.
Korea┃2022┃28min┃이창동: 보이지 않는 것의 진실
전 세계 최초 공개작. 세계보건기구(WHO)와 베이 징현대예술기금(BCAF)이 세계적 감독들에게 우울증을 주제로 의뢰한 단편영화 중 하나. 원테이크로 한 소년을 쫓아가는 이 영화는 20여 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우울증이라는 주제를 담으면서도 한국사회의 단면까지 예리하게 드러내 거장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USA, Korea┃2022┃90min┃코리안시네마
〈헤로니모〉(2019)에 이어 전후석 감독이 만든 두 번째 장편영화. 2020년 미국 상·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5명의 재미 한국인을 따라가는 생동감 넘치는 다큐멘터리다. 공교롭게도 이들 중 주인공에 해당하는 진보적 후보 데이비드 김만 낙선하는데, 그가 재기를 다짐하는 모습에서 묘한 동질감과 위안을 얻을 이도 꽤 있을 것이다.
Lebanon, France, Qatar┃2021┃89min┃ 프론트라인
1957년부터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야무크 지역에 형성된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면서 러시아(!)를 등에 업은 알아사드 정권에 의해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철저하게 봉쇄된다. 이 기간 동안 모든 것이 차단된 이 지역과 주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이 영화에는 굶주림과 고통뿐 아니라 음악과 사랑, 그리고 삶의 희열까지 담겨 있다.
문석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2000년부터 영화주간지 『씨네21』에서 취재기자, 취재팀장, 편집장,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산업 프로그래머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