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이 주는 예쁘고 상큼한 이미지를 관객 각자가 자신의 상상 속에 특별한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면? 〈튤립 모양〉은 3년 전 도쿄에서 잠깐 만난 남자를 잊지 못해 그를 찾으러 공주로 여행 온 유리코(유다인)와 무성영화 속 일본 배우의 행방이 궁금한 석영(김다현)의 연애사다. 이 연애, 참으로 정갈하면서 이들의 미래는 어떨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양윤모 감독은 〈튤립 모양〉이 관객 각자의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어떤 계기로 구상한 작품인가?

몇 년 전, 일 때문에 공주에 다닌 적이 있다.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오고 가며 공주의 풍광을 살펴보는 경험이 됐다. 산과 강이 고즈넉하게 어우러지는 특유의 정서가 좋았고, 그러다 이 도시에 정이 들었다. 한편으론, 당시 기준으로 지난 몇 년 사이 만났던 좋은 일본 사람들과 일본 영화들, 방문 경험들이 떠올랐다. 그런 것들이 시간을 두고 조금씩 합쳐지면서 어느 순간 공주를 배경으로 일본과 연관된 좋은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유리코와 석영이 직접 시를 지어 주고받다가 영화의 제목을 언급한다. 제목을 ‘튤립 모양’으로 확정한 배경은 무엇인가?

일단 주제나 내러티브를 설명적으로 드러내는 제목 짓기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두 인물이 주고받는 시들이 극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양’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형상과 이미지, 기억과 상상 등의 소재를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흑백 화면으로 촬영했다. 유리코의 “저 이렇게 예쁜 파랑은 처음이에요” 대사를 듣고는 관객 입장에서 상상으로 색을 입히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이 영화의 우화적인 기조, 빛과 피사체의 조형성을 부각하면서 형상의 근본에 더 집중하는 특성이 함께 고려되었다. 극 중 영화와 꿈, 현실이 색이나 화면 비율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숏과 숏의 대등한 연결을 통해 공존하기를 바랐다. 질문의 내용에 동의한다. 관객 각자가 다양한 상상을 더 하며 이 영화를 감상했으면 좋겠다.

 

1.37:1 화면비의 영화다. 〈튤립 모양〉의 주제 중 하나가 영화와 현실의 연결이다. 그런 점에서 작은 스크린 화면비를 넘어 현실로 확장하는 이야기를 염두에 둔 선택이 아닐까 한다.

앞에 언급한 공존을 비슷한 시각에서 짚어준 질문 같다. 화면 비율 관련해서는, 산업적 소요를 떠나 생각해보면 회화나 사진에서부터도 그렇고, 1.3:1~1.5:1 정도가 이미지를 표현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네모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이미지를 표현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1.37:1은 구상하던 이미지들에 가장 적합한 비율이었다.

 

연결’이라는 키워드를 연상케 하는 설정이 꽤 많다. 유리와 유리코와 가와기타 유코 등 극 중 이름의 유사성, 영화배우 유코를 잊지 못하는 석영이 유리코를 만난다는 설정, 영화의 후반부 기차 소리와 필름 돌아가는 소리를 하나처럼 이어붙인 편집 등이 그렇다.

메시지라기보다는 구상 과정에서 바탕이 됐던 생각 중에 공유해보면, 개인 신체의 움직임 혹은 사회 내에서 만들어진 탈것을 활용한 이동, 이동을 통한 연결 가능성, 연결을 통해 가능해지는 공존의 잠재력이 있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느낀다. 수치나 절망의 과거로부터, 공허한 환상의 장소로부터, 관습적인 지각으로부터. 그래서 먼저 움직일 수 있고 향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사 시작과 함께 숏의 연쇄를 통한 시공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영화는, 종종 언어와 국경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자유로운 연결과 공존의 희망을 가장 주도적으로 실천해온 매체라는 생각이 든다. 영사 소리는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에서부터 이어진다. 관객들이 그 소리들을 아름답게 느꼈으면 좋겠다.

 

〈튤립 모양〉을 보면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삶이란 그런 연결고리를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3년 전 남자를 못 잊는 여자의 국적을 일본으로 택한 배경이 궁금하다.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일본은 어쨌거나 가장 가까운 나라다. 가깝기 때문에 그만큼 또 많은 것들이 얽혀있는 것일 테다. 그런 연결고리를 찾아나가면서 우선 가장 가까이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디 있어요?”라는 자막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이는 유리코가 도쿄에서 만났던 한국 남자를, 석영이 영화배우 유코를 찾는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장이다.

그 숏은 영화 속 무성영화의 자막이다. 다음 숏에서 한 인물이 나무 뒤에서 스윽 모습을 드러낸다. 두 숏은 영화 속 무성 영화의 이어지는 이미지로, 그러니까 한국어 자막 “어디 있어요?”는 영화 속 영화의 자막이기도 하고 〈튤립 모양〉의 자막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그 시점에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물론 이 자막은 질문처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유리코 역의 유다인 배우는 영화 관객들에게 〈혜화, 동〉(2011)과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2020)로 알려졌다. 일본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일본인이 한국 발음하는 연기가 너무 훌륭해 바로 감정이입이 됐다.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

유다인 배우의 댕그랗게 큰 새까만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오랜 시간 기다려온 사람의 우수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맑게 유지되고 있는 우수였고, 그런 만큼 내면이 강인한 사람의 인상이 있었다. 경험적으로 익숙한 캐릭터나 작품 스타일은 아닐 수 있지만, 유리코를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석영을 연기한 김다현 배우, 유리코가 공주에서 묵는 민박집 주인 역의 문희경 배우의 캐스팅도 궁금하다.

김다현 배우는 선이 고운 연기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잘 빚은 조각처럼 고운 얼굴선이 프레임 내에서 효과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을 거란 예상이 있었다. 인품에 대한 기대와 함께 배우 고유의 결이 이 영화의 결과 닮은 측면이 있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문희경 배우는 소녀적인 모습도 일편 간직하고 있는,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의 인상이었다. 선배님과 만나 얘기를 나눠 보니 제주도 시골에서 자연을 벗하는 유년기를 보내셨더라. 그런데 나중에 TV에서 ‘센 사모님’ 역할을 많이 해왔던 배우란 얘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상반신이 드러나는 정면 숏이 많다. 극 중 인물들이 서로 바라본다는 것 외에 관객들과 대면한다는 인상도 강하다.

그런 숏들은 유리코가 다시 한번 영화 출연 제의를 받고, 두 사람이 확실히 연인 관계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할애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론 떠들썩한 사건과 갈등이 드러나지 않지만, 두 인물은 지금 스스로도 일생에서 손에 꼽을 중대하고 비장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이 세계 속에서 위태하지만, 당당하고 용기 있게 이 순간들을 바로 마주해나가기를 바랐다. 또한 그들을 그렇게 응원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영화 매체와 영화 이미지에 대한 근원적인 매혹이라는 소재에 비춰 두 인물과 관객이 일종의 시선을 통한 삼각관계를 이루는 상황도 염두에 뒀다.

 

극 중 인물들이 맑고 곱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로 이들을 둘러싼 배경인 공주를 꼽고 싶다. 가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 속 공주는 정말 아름다웠다.

언급한 질문에 더해 생각해보면, 공주는 백제의 웅진 시대 도성이었고, 도시는 당시 유적지들을 몇몇 포함하고 있다. 내가 따로 유적지들을 둘러보러 갔을 때도 일본 단체 관광객들이 와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은 지형적 특성이, 어떤 하나의 독립된 세계 같은 정서에서 영화 속 여행자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에 활용된 음악은 모두 케빈 매클라우드(Kevin MacLeod)의 것이다. 특별히 그의 음악을 주목한 이유가 있나?

메인 테마로 쓰인 곡을 영화 구상 시기에 우연히 어디선가 들었다. 곡이 좋았고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막연하게 꽤 오래된 곡일 거라 생각했다. 찾아보니 동시기 한 음악가가 어떤 이유에서 저작권을 풀어놓은 곡들 중 하나였다. 상당한 양의 곡들이 라이브러리화돼서 검색하며 바로 들을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제작 여건이 여유 있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곡을 만든 음악가라면 이 사람을 믿고 처음부터 이 라이브러리만 활용해서 완성한다는 제약을 걸고 〈튤립 모양〉의 작업을 시작했다.

 

극 중 유리코와 석영의 만남이 계속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감독의 다음 작품도 궁금하다.

영화사에 익숙한 경구 하나를 빌어 얘기해보면, 〈튤립 모양〉은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꽃 한 송이로 이뤄진 단순한 영화로 만들고자 했다. 다음엔 여자 하나, 남자 하나, 유령 하나로 이뤄진 단순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아, 물론 무서운 유령은 아니다.(웃음)

양윤모
1983년 서울 출생. 시카고예술학교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단편 실험영화 여러 편을 만든 후 장편 극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튤립 모양〉은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