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전주국제영화제에 합류한 전진수 프로그래머는 실험과 도전을 지향하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본류에 해당하는 ‘월드시네마’, ‘프론트라인’ 섹션과 함께, 영화제의 대중성을 위한 ‘시네마천국’ 섹션의 프로그래밍을 맡고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세계의 영화’, ‘최전선의 영화’이자 ‘천국의 영화’, 말하자면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밍의 극단을 가로지르는 부문들이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프로그래머는 이들 섹션의 개요 및 특징과 함께 주목해야 할 영화 몇 편을 지목해 언급한다.


월드시네마, 프론트라인 섹션을 맡고 있다. 섹션 설명을 부탁한다.

월드시네마는 ‘영화제 프로그램의 허리’를 맡고 있는 중추적인 섹션이다. 모든 영화제는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섹션을 갖기 마련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우 국제경쟁, 전주시네마프로젝트, 프론트라인, 영화보다 낯선, 특별전 등으로 그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관습, 자본, 정치와 같은 외부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영화를 발굴하고 지지해 온 전주만의 독특한 색깔인 것이다._하지만 월드시네마의 경우 전주 고유의 특징을 고집하기보다는 메이저 제작사의 작품이나, 메이저가 아니더라도 꽤 큰 규모의 영화들, 그리고 대중성이 어느 정도 고려된 작품들까지 그해 해외 영화 경향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작품을 상영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상황에서 200편이 넘는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라면 반드시 필요한 섹션이라고 생각한다.

프론트라인의 경우, 작년 제21회 영화제 때 월드시네마 섹션에 통합시켰던 섹션인데, 월드시네마 섹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관객들의 영화 선택에도 오히려 혼선을 줄 것 같아 부활시키기로 했다. 영화보다 낯선 섹션이 주로 형식적인 실험과 도전에 초점을 맞췄다면, 프론트라인 섹션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도발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상영한다. 월드시네마 섹션에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어떤 한계에까지 이르는 작품들을 따로 떼어서 조명하는 섹션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시네마천국은 그 이름처럼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상영하는 섹션이다. 제21회 영화제에서는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들에 주안점을 맞춰서 프로그래밍되었다면, 올해부터는 그에 더해 대중성이 담보된 작품들로 꾸며진다.

 

예년과 섹션 성격 측면에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프론트라인 섹션을 부활시킴으로써 전주국제영화제의 성격을 더 부각하고자 했고, 반면에 시네마천국 섹션의 범위를 좀 더 넓혀서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들도 풍성하게 준비하려고 했다. 22회를 맞이하기까지 지난 영화제들을 돌아보면 섹션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프로그래머가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도 있었고, 그때그때 시대적인 필요에 의해서, 또 해외 영화계의 흐름이 바뀜에 따라 변모한 측면도 있었다. 물론 영화제의 성격을 대표하는 섹션들의 변화는 신중해야 하겠지만, 다른 섹션들은 끊임없는 유지와 보수 과정을 겪어야 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 또한 프로그래머의 업무라고 생각한다.

 

프론트라인 섹션 라인업 구성 시 가장 염두에 둔 점은?

가능하면 다양한 테마의 작품들을 고르려고 노력했다. 올해 프론트라인 섹션에서 상영되는 열 편의 영화들은 사적인 경험을 담아낸 작품에서부터 환경 파괴와 지역 공동체의 붕괴에 대한 작품, 그리고 역사적인 주제에 관한 작품까지 다양하다. 특히 홍콩의 민주화운동인 우산혁명을 다룬 두 편의 다큐멘터리 〈입법회 점령사건〉과 〈붉은 벽돌벽 안에서〉 같은 경우, 크레딧에서 볼 수 있듯이 무수한 홍콩의 저널리스트들과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협업을 통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1인 매체 시대에 걸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이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들이야말로 앞으로 프론트라인 섹션에서 다뤄야 할 작품들일 것이다.

 

‘스포츠는 여성의 것’ 섹션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월드시네마 작품을 고르는 과정에서 우연히 여성 스포츠에 대한 보기 드문 작품들이 4편 모였다. 이 작품들을 작지만 흥미로운 섹션으로 모아서 상영해 보자는 아이디어로 만들게 됐다. 더구나 올해 ‘스페셜 포커스: 인디펜던트 우먼’이라는 특별전을 진행하는 것도 ‘스포츠는 여성의 것’ 섹션의 기획에 영향을 끼쳤다.

‘월드시네마: 스포츠는 여성의 것’에서 상영하는 네 편의 작품이 조명하는 종목도 서핑, 역도, 체스, 배구로 특이하고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1960년대 일본 여자 배구 팀에 대한 다큐멘터리 〈동양의 마녀들〉을 우선 꼽고 싶다. 물론 고등학교 때까지 배구를 하기는 했으나 이후 방직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이 근무가 끝난 뒤에 모여 훈련을 거듭한 끝에 회사를 대표하는 배구팀에서 선수로 활약하게 되었고, 그 실업팀이 그대로 일본 국가대표 팀이 되어 세계 대회에서 당시 자타가 공인하던 세계 최강 구소련 대표팀까지 격파하며 무패의 전설을 만들어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특이하게 조지아라는 나라의 여성 체스 선수를 다룬 〈여왕에게 영광을〉이라는 작품도 빼놓을 수 없다. 남자들도 어려운 세계 체스 그랜드마스터에 조지아의 여성 체스 선수가 이름을 올리는데, 심지어 전설적인 여성 체스 마스터를 4명 연속으로 배출하기까지 하니 더 놀라움을 주는 작품이다. 물론 물론 서핑과 역도에 대한 작품 역시 너무나 흥미롭다.

 

시네마천국 섹션의 올해 특징은?

시네마천국의 범위를 조금 더 넓힌 만큼 좀 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우선 세 편의 일본 영화와 한 편의 대만 영화를 만날 수 있는데, 다른 섹션에서 동아시아 작품들이 예년보다 조금 부진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래도 시네마천국에는 감동과 함께 나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들이 선정되었다. 일본 이시이 유야 감독의 신작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이케마츠 소스케와 오다기리 죠 같은 일본의 유명 배우들과 최희서, 김민재 배우가 출연했고, 한국 스태프와 100% 한국 올로케이션 촬영을 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대만 작품 〈짱개〉 같은 경우는 대만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주인공이 겪는 차별을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같은 환경의 감독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내면서 우리의 고정관념과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재즈 카페 베이시〉도 일본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재즈 카페’라는 독특한 문화 공간을 그 역사와 함께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시네마천국 섹션만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무엇보다도 다양한 세대의 관객을 아우르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갖춘 영화를 소개하는 섹션이다. 그만큼 월드시네마 못지않게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좀 더 캐주얼하게 만날 수 있는 섹션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영화제 슬로건을 ‘Film Goes On’이라고 했다.

영화제 사무국에서 제22회 영화제의 슬로건을 고민하다가 여러 의견을 제치고 집행위원장이 낸 아이디어인 ‘Film Goes On’으로 슬로건을 정했다. 사실 21회 영화제를 치르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영화제의 모든 스태프들이 너무나 힘든 한 해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일찍이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21회 영화제를 찾았던 한국의 출품작 감독과 배우들을 만나며 이들이 스크린을 매개로 얼마나 관객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느끼면서였다. 그런 점에서 ‘Film Goes On’이라는 슬로건은 너무나 적절하고 앞으로도 영화제가 가져가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상황이 여전히 엄중한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이상이랄지, 기대하는 점을 말해달라.

비록 부분적인 오프라인 영화제가 되더라도 우리가 준비한 영화들이 스크린을 통해서 관객들을 만날 수 있다면 지금의 많은 노력들이 헛되지 않을 것 같다. OTT 플랫폼 또한 영화제가 더 이상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안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일시적인 미봉책이 아니라 더 가다듬어 발전시켜야 할 새로운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제가 변화해갈 모습들이 더욱 기대되고, 그 역사적인 변화의 시대에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Invitation Letter

불현듯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직은 쌀쌀하게 느껴졌던 바람도 기억나고, 고속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기 직전 보았던 전주 천변의 노란색 꽃들도 떠오릅니다. 영화의거리와 동문거리를 지날 때면 왜 그리 아는 사람들을 많이도 만나게 되던지…

 

그 이후 두 번 정도를 제외하고는 매년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영화제에서 일까지 하게 되었죠. ‘라떼는’이라고 욕하셔도 할 수 없지만, 그때는 지금의 한옥마을도 KTX도 없었습니다. 전동과 교동의 오래된 한옥들에 다 사람들이 거주했던 시절이고, 그 호젓함이 얼마나 좋았던지…

 

예, 저는 전주를 좋아합니다. 전주가 좋은 이유야 많습니다. 막걸리집과 선술집의 푸짐한 인심도 있고, 전주향교를 산책하는 즐거움도 있고, 전통 찻집에 앉아 멍 때리기도 좋고, 요즘은 팔복예술공장의 힙한 매력도 있네요. 아! 메뉴 짜느라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맛집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였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다시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여러분이 감상하실 영화를 고릅니다. 언젠가 여러분도 전주를 좋아하게 되는 때가 생긴다면, 그 시작이 저처럼 전주국제영화제였으면 좋겠습니다.


Programmer’s Picks

 

 


전진수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면서 각종 매체에 음악 관련 글을 썼다. 음악잡지 『레코드리뷰』의 편집부 차장으로 일하다가 프랑스로 가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공부했다. 21세기가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15년 정도 여러 방송국에 나가 음악 해설도 했다.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의 마스터클래스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2006년부터 2019년까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2020년부터 전주국제영화제로 옮겨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