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구용 감독의 〈밤 산책〉은 풍경의 묘사보다는 풍경을 바라보는 내면의 집중한다. 내면의 관조와 사색을 표현하기 위한 조형적 시도들은 다양한 매체들과 시간들을 영화로 불러들이고, 하나의 정서로 관객과 감응한다.


고정된 위치의 카메라, 모노크롬 화면, 디지털 드로잉, 고전 시구, 무성영화라는 형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구상할 때부터 정한 것인가.

구상할 때부터 정한 것은 고정된 숏과 모노크롬 화면이었다. 풍경을 주 대상으로 삼게 된 전작 〈오후 풍경〉(2020)부터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고정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번 작품 〈밤 산책〉에서는 내가 촬영(撮影)의 본래적 의미라고 생각하는 ‘빛을 모으는’ 행위에 걸맞게 긴 시간 동안 풍경과 사물을 렌즈에 담고자 했기 때문에 카메라 고정은 필수였다. 모노크롬은 이 영화의 시작점과 관련이 있다. 어느 여름 밤 영화의 배경이 된 세검정에서 우연히 냇물 속 밤하늘을 보고 물과 하늘 사이 나의 존재가 지워진 듯한, 물과 하늘 사이 공기와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극히 미적인 체험이었고, 그 감흥은 검푸른 빛깔로 다가왔다. 마치 세상이 전부 쪽빛으로 물든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미지에 푸른 틴트를 적용하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모노크롬을 택했다.

 

나머지는 모두 촬영과 편집 과정에서 정했는지.

그렇다. 드로잉과 영상의 혼합은 이전 작품부터 시도해온 방식이다. 이전 작업에서는 그림을 다른 작가가 그렸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작업했다. 붓펜으로 스케치북에 그린 후 디지털 스캔을 했다. 밤의 서정을 반 구상, 반 추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에 삽입된 시구들은 촬영 기간 동안 읽은 조선 시대 문집에서 인용한 것이다. 촬영 초에는 영화에 들어갈 텍스트를 직접 썼지만, 점차 이 문집들 속 밤을 노래하는 시들이 마음에 들어왔다. 문인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정서와 내가 개울가에서 느꼈던 감흥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무성은 편집 과정에서 사운드가 계속해서 이미지를 방해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선택하게 되었다. 촬영할 때 소리만 따로 녹음해 가며 사운드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막상 편집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이미지와 불협화음을 내는 느낌이 들었다. 회화적으로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직감이지 않았을까. 사운드를 없애고 나니, 더 바라던 그림이 나왔다.

 

드로잉과 함께 관객들에게 제시되는 시구들을 모두 한자로 지어진 고전시에서 인용된 것이다. 고전시를 택한 이유, 그리고 그것을 한글 번역본으로만 전달하는 이유가 있을까.

풍경영화를 만들면서 풍경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고민을 항상 가지고 있었고, 문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좀 더 서정적인 길을 찾고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에서 작업의 뿌리와 기둥이 되어줄 과거의 전통을 찾고자 이런저런 공부를 하던 중 문인화의 ‘사의’(寫意)라는 개념에 몰두하게 되었다. 문인화의 회화적 이상이기도 한 이 개념은 특정 대상에 대한 재현주의적 접근으로부터 벗어나 물질의 형상과 마음의 작용의 오묘한 결합을 추구하며 종국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 풍경과 사물을 그려내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미학적 특질을 영화 작업에 적용하여 풍경의 서정적 면모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시는 많은 문인화가들에게 화제(畫題)였고, 영화 작업에서도 다양한 한시의 구절들과 촬영한 영상과 그린 그림들이 서로 간 소통하며 상호작용한다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닌 내면의 풍경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극히 외향적인 매체를 갖고 내향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싶다는 포부가 자칫하면 관념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수반하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시도해보고 싶다. 한글로만 적은 이유는 화면을 단순화해서 전달력을 높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줄 또는 네 줄의 시구만 발췌해서 넣은 이유 역시 전달력 때문이었는데, 관객이 직접 읽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단순화하고 싶었다.

 

이 영화에는 풍경과 비인간 동물들, 사물만 등장한다. 화면에서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동시에 이 풍경들을 카메라 뒤에서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다는 점, 바라보는 이의 감성에 의해 영화가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가 크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서정적 풍경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카메라 앞의 인간을 지우고 뒤에 있는 나의 감성에 더 집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감성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내포하고자 한 정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자신의 에고에 대한 집착이 가장 희미해졌을 때 느끼는 외물과의 합일감에서 기인하는 각자의 그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카메라의 렌즈는 언제나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기에 그 지향성은 외부에 있기 마련이지만, 이 작업을 통해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그 렌즈를 180도 돌려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영화 속 다양한 풍경이 마치 마음속의 이미지들처럼 보였으면 했다. 외부 세계를 통해 마음의 세계를 드러내고 싶었다는 점에서 관찰보다는 관조, 분석보다는 감상,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이 영화와 어울리는 낱말들 같고, 관객 스스로가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

 

이 영화는 해외 관객에게 더 먼저 공개되었다. 인용된 시구들이 주는 감상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갖는 해외 관객들의 감상, 반응이 궁금하다.

무성영화인데다 서양관객들에게 낯선 한시가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됐다. 그러나 다행히 상영 후 반응이 무척 좋았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자아내는 밤의 정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다. 특히, 날짜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모양이 변해가는 달을 보며, 그리고 그 달을 읊은 시들을 읽으며 함께 산책하는 과정이 밤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에 빠지게끔 했다는 감상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시구들이 읊은 달의 시정(詩情)은 지극히 동양적 미감을 지닌 사람만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서양 관객들의 공감이 놀라웠다.

 

〈밤 산책〉은 장소들을 촬영한 영상 위에 드로잉, 텍스트가 얹힌다는 점에서 다층적인데, 동시에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여러 날, 여러 시간대로 추정되는 밤의 산책들, 하나의 숏에서도 흐르는 시간들, 고전 시의 시간, 그리고 그것을 번역한 시간, 이렇게 여러 겹의 시간대가 관객에게 〈밤 산책〉이라는 영화의 형태로 제시된다.

영화란 결국 특정 타임라인에 배치되어 시간의 경과가 발생하지만, 아무래도 나의 작업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A에서 B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A에서 머무는, 어찌 보면 시간이 지워진 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와 소리를 특정 맥락 안으로 끌고 들어와 그 조각들을 어떠한 형상으로 직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왔는데,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다층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 질문에 언급된 시간들 중 고전 시의 시간과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의 시간이 하나가 되어 함께 흐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달을 읊은 시들을 읽으며 몇백 년 전의 문인들이 바라보았을 달이 놓인 밤하늘과 내가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됐던 그날 밤의 개울물 속 밤하늘이 하나의 시간 속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시간이 이 영화를 보는 관객분들의 시간과도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손구용 Koo-yong SOHN

1988년 출생. 총 4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최근작 〈밤 산책〉으로 제52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