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영화는 유죄의 기록이다.” 〈세상은 그렇게 끝난다.〉는 이 의미심장한 선언과 함께 시작한다. 12·3 비상계엄 선포 당일부터 내란 재판이 시작되기까지의 1년여가 23분의 강렬한 압축본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타임라인 위로 예상치 못한 사건이 포개진다. 감독이 서울서부지법 폭동 현장 촬영 중 체포된 뒤 취재의 공익성을 인정받지 못해 건조물 침입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유죄’의 기록이다. 혹은, 지난 20여 년간 카메라를 들고 사회 곳곳을 누비며 정치적 작품 활동을 펼쳐 온 한 예술인이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해 다시 한번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고자 시도한 결과다. 영화는 되묻는다. 누가 진짜 유죄인가? 2026년 봄, 대법원 판결을 앞둔 정윤석 감독은 앞으로 “세상의 끝에서 흐느끼는 대신 끝까지 밝은 눈을 뜨고 지켜보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세상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수 있다.


2025년 1월 서울서부지법에서 현장 취재 중 체포된 이후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1·2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2026년 2월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난 1년은 법정이라는 또 다른 촬영 현장에서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과 지루한 공방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지금은, 그동안 법적 대응에 밀려 미뤄 두었던 촬영본들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며 일상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유죄 낙인이 삶과 작업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니까.

 

〈세상은 그렇게 끝난다.〉는 나름의 방식으로 12·3 내란 이후의 타임라인을 제시한다. 어떤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구성했으며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12·3 내란은 단 하루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 ‘균열의 시작점’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이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망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무력화되고 사람들이 침묵에 익숙해지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우리가 그 타임라인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본 영화는 유죄의 기록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이 선언의 의미에 관해 들려준다면. 

국가가 나의 카메라와 시선을 ‘불법’과 ‘유죄’로 규정했다면, 기꺼이 그 유죄의 타이틀을 짊어지겠다는 역설적인 선언이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기록하는 행위가 죄가 되는 사회라면, 이 영화 전체가 거대한 범죄의 증거물인 셈이다. 엔딩에서 언급되는 윤석열 1심 판결은 오프닝에 대한 시적 대구이자 동시에 나를 심판한 사법부와 권력을 향해 ‘진짜 유죄는 누구인가’를 묻는 고발장이기도 하다.

 

T. S. 엘리엇의 시 「The Hollow Men」(1925)과 그 시구를 각각 영제와 원제로 삼았다. 영화에는 해당 시의 발췌문이 인용되어 있다. 엘리엇의 시와 이 영화의 관계가 궁금하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방향성을 상실하고 텅 비어 버린 현대인들을 ‘텅 빈 사람들hollow men’이라 불렀다. 12·3 내란 이후 내가 목격한 권력자들, 그리고 부당한 명령에 영혼 없이 복종하던 이들의 모습이 정확히 그 시구와 겹쳐 보였다. “세상은 그렇게 끝난다 / 쾅 소리가 아니라 흐느낌과 함께.” 이 마지막 구절은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우리 사회에 감도는 무력감과 패배주의를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시와 성경을 인용했을 뿐 아니라 주요 개념어나 사건 흐름에 관해 사전적 정의나 짤막한 설명을 제시하는 등 영화 전반에 걸쳐 텍스트를 적극 활용했다. 이런 장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효과를 기대했나?

권력은 항상 언어를 독점하고 왜곡한다. ‘폭동’, ‘내란’, ‘치안 유지’ 같은 단어들이 어떻게 오용되는지 우리는 뼈저리게 겪었다. 관객들이 스크린 위에 명확히 박제된 텍스트와 사전적 정의를 눈으로 읽으면서, 권력이 오염시킨 언어의 진짜 의미를 되찾기를 바랐다. 시각적 이미지에 압도당하기보다, 텍스트를 통해 이성적으로 상황을 거리를 두고 판단하게 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의도했다.

 

촬영 중 체포되어 1년 넘게 재판을 받아 왔다. 이 일이 영화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들려 달라. 

원래 이 영화는 제3자의 위치에서 사태를 관찰하는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서부지법에서 체포되어 피고인이 되면서 나 자신이 억압적인 구조의 당사자이자 피사체가 되었다. 법정에서 겪은 부조리와 공권력의 민낯이 영화의 톤과 매너를 결정지었고, 관찰자에서 증인으로 위치가 변하면서 영화의 방향성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 결과 영화는 훨씬 더 개인적이고 날카로워졌다.

 

2022년 시행된 「예술인 권리 보장법」 제3조는 “예술 표현의 자유는 (······)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보호되어야 한다”고 공표한다. 제6조에 따르면 이 법은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하여 다른 법률보다 우선하여 적용”된다. 이 법률이 실질적으로 예술인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논의와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보는지. 

법전 위의 활자는 훌륭하지만, 현실에서 국가 보안이나 질서 유지라는 명분이 등장하면 예술인의 권리는 너무나 쉽게 밀려난다. 이번 재판이 그 증거다.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서는 창작에 대한 검열이나 사법적 위협이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법률적 지원 기구가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야 한다.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언론인과 달리 예술가의 취재는 공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 행위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헌법의 평등 조항에 위배되는 현실이다. 예술가들 스스로가 파편화되지 않고 연대하여 선례를 만들어 나가는 움직임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가?

카메라를 빼앗기고 법정에 섰던 시간 동안 역설적으로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명확해졌다. 앞으로는 거대한 담론이나 사건 자체보다, 그 폭력적인 구조 아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저항하는 ‘개인들의 미시적인 얼굴’들을 기록하고 싶다. 세상의 끝에서 흐느끼는 대신 끝까지 밝은 눈을 뜨고 지켜보는 영화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