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앨범: 선생님을 기다렸다The Yearbook: Waiting for the Teacher
감독 김종관KIM Jongkwan | Korea | 2025 | 102 min | Documentary | 코리안시네마Korean Cinema
1980년 5월, 광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계엄군이 광주 시내 전역을 장악한 5월 27일, 1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전주 완산구의 신흥고등학교 운동장에 학생들이 계엄 철폐를 외치며 집결한다. 무장한 군이 학교를 에워싼 가운데 교문을 막아서며 학생들을 제지하는 선생들. 징계를 받고 학교 밖으로 쫓겨나 뿔뿔이 흩어진 학생들. 그렇게 졸업 앨범에서 여러 얼굴이 지워지고 사제지간은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단절된다. 그로부터 40여 년. 김종관 감독은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시작된 학생과 선생의 대화를 지켜본다. “복잡한 상황 속에 놓였던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를.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전주 출신 다큐멘터리 감독 김종관이다. 동국대 일반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 연출을 전공했고 졸업 후 KBS, EBS 등 지상파 레귤러 교양 프로그램 및 다큐를 오래 연출했다. 방송은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이었고 독립 다큐멘터리는 그 이전부터 병행해 온 나의 정체성이었다. 동물권, 환경, 5·18 민주화 운동 등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작업을 이어 오고 있다. 제작사 이름을 ‘오월’로 지은 데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다.
1980년 5월 전주 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이 벌인 계엄 철폐 시위와 그 여파,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를 영화로 담아내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하다.
신흥고등학교와의 인연은 사실 그보다 훨씬 앞에 있다. 나는 신흥중학교 출신이다. 처음 5·18을 접한 건 1987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 과학실에서 광주 사태 비디오를 봤는데, 아마 형님들 중 누군가가 중학생들도 보라고 두고 간 것 같았다. 열네 살의 나는 그렇게 광주의 참상을 처음 눈으로 마주했다. 시각적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까. 그 장면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이었다. 촛불의 바다 속에서 청소년들이 당당하게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서,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문재인 후보가 전주 신흥고를 방문한 사진이었는데, 1980년 5월 27일, 이 학교에서 교사가 신군부에 저항하는 시위를 이끌었다는 내용이 함께 있었다. 어린 시절 동생이랑 매일 자전거를 타며 놀던 동네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몹시 놀라웠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했고 완성까지 8년이 걸렸다. 신흥고가 어떤 학교인지 알아 가는 과정 자체가 경이로웠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해 폐교가 됐고, 4·19 때도, 6·25 때도 역사의 변곡점마다 이 학교는 어딘가에 서 있었다. 5·18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광주와 전남의 이야기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당시의 참상을 알리고 함께하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이들이 뜻을 모았다는 사실, 그 ‘광주 바깥의 5·18’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했다.
부제 ‘선생님을 기다렸다’는 영화 내용을 전혀 모를 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부제를 짓기까지 어떤 고민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먼저 작품 제목인 ‘졸업 앨범’부터 설명드려야 할 것 같다. 당시 시위에 참여해 무기정학 등 징계를 받은 상당수 학생들은 졸업 앨범을 받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이 촬영 과정에서 처음으로 졸업 앨범을 손에 쥐는 순간이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소중한 학창 시절을 기념하지 못한 신흥고 학생들을 상징하는 동시에, 역사가 그들에게서 빼앗아 간 것들을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제목을 ‘졸업 앨범’으로 붙였다.
부제는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2024년 12월부터 시작된 편집 기간 내내 부제는 ‘선생님은 오지 않는다’였다. 단순히 임시로 붙여 둔 제목이 아니었다. 그 제목을 달고 여섯 달 넘게 편집을 이어 갔고, 수시로 들여다보면서 과연 이게 맞는가를 끊임없이 물었다.
그러다 편집이 약 45분 분량쯤 됐을 무렵, 무언가 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오지 않는다’—그런데 선생님이 정말 일부러 학생들을 찾아가지 않은 걸까. 되짚어 보면 구속된 학생들이 어디 있는지가 학교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주동 학생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경찰에 잡혔는지 신군부에 연행됐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학교 당국이 붙들고 있어야 했던 것은 학교가 폐교되지 않도록 지키는 일, 남은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제목을 바꿔야겠다는 걸 알았다. 마침 허천일 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유치장에 갇혀 있을 때, 선생님을 증오하는 마음이 컸나요?”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는 선생님을 기다렸던 것 같아.” 그 말이 제목이 됐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을 기다렸다’라는 말은 허천일 씨 한 사람만의 고백이 아닐 것이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짓밟고 권력이 마음껏 휘둘러지던 그 시대를, 이 땅의 시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텨 내야 했다. 위로의 말 한마디, 방향을 제시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그 의미에서 ‘선생님을 기다렸다’는 한 사제 관계의 이야기를 넘어, 그 시대를 살아 낸 모든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이 자신 혹은 타인에게 던지는 질문은 스크린 너머 관객도 함께 고민해 보게 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은 [수십 년 전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이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보편적 질문으로도 이어지는 듯 보인다. 영화를 통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었는지 말씀해 주신다면.
촬영을 하면서 인터뷰의 마지막에 항상 같은 질문을 했다. “5·27 시위가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그때마다 돌아오는 말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이후의 삶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선택만큼은 하지 않으려 했다고. 죽음을 각오하고 운동장에 나섰던 그 순간이 훼손되지 않도록, 오늘 하루의 작은 선택들도 그 기억을 붙들고 살아왔다고. 5·27은 그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었다. 평생토록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게 하는 기준점으로 살아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계속 부딪혔던 것이 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 혹은 광주 항쟁의 희생자들에 대한 편견 같은 것이다. 신군부는 그들을 폭도로 매도했고, 반대로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그들을 영웅으로 특별하게 다뤄 왔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 보면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었다. 어떤 복잡한 상황 속에 놓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든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겪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그 복잡한 상황을, 복잡한 마음들을, 관객 누구든 이해할 수 있게끔 풀어 보고 싶었다. 역사적 사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함께 느끼게 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필름메이커의 역할이었다.
관객은 처음에 학생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다가 이후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에게도 상처가 남았음을 알게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루어진 대화에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뿐 아니라 죄책감, 후회, 부끄러움, 원망과 존경심이 여전히 뒤섞여 있고, 그 점이 무척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감독님은 이해와 화해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45년 동안 역사가 갈라놓은 사제 간의 거리, 그 감정의 골짜기—사실 그건 사제가 원해서 생긴 게 아니었다. 시민들을 통제하려 했던 권력이 만들어 낸 구조였다. 피지배층이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 그게 그들이 가장 즐겨 쓰는 방식이니까. 분열은 권력의 가장 오래된 무기다. 그 구조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증오하도록, 서로를 의심하도록 오랫동안 길들어 왔다.
그래서 화해가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문제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대의 폭력 앞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상처받았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것, 그게 반독재와 반권위주의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길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그 일부다.
그런 생각이 영화의 구성에도 반영됐다. 다양한 버전을 시도했지만 결국 가장 단순한 구조를 택했다. 학생들의 시선에서 본 사건, 학생들의 시선에서 본 책임, 선생님의 이유, 그리고 현재.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 주는 것, 관객이 스스로 느끼고 판단할 여유를 갖는 것—그게 이 주제를 다루는 데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2·3 내란이 가능했던 까닭은, 우리가 그 역사적 골짜기들을 아직 다 건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그 내란이 유혈 사태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회가 그 고통의 경험들을 어딘가에 깊이 새겨 놓았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는 그렇게 우리 안에 살아 있다.
후반부에 5·18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을 위해 광주 시청을 찾은 이가 말한다.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흔적을 남기자.” 이 영화 또한 세상에 공개되어 하나의 흔적으로 남게 되었다. 흔적을 남기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흔적을 남기자.” 영화 속에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곧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라는 걸 느꼈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더 정확하게는, 기록된 것만 살아남는다. 신흥고 5·27은 45년 넘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사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촬영 중에 만난 한 분은 트라우마 때문에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6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카메라 앞에 앉아 준 분들 덕분에 이 영화가 가능했다.
이 사건이 이토록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중앙의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 바깥에서 벌어진 일들은 45년이 지나도록 지워진 채로 남아 있다. 전북 지역도 마찬가지다. 신흥고 학생들의 시위는 고등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벌인 일이었는데도, 정작 전북의 중고등학생들은 이 사건을 모른다. 오늘 광화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면서, 우리 동네 학교에서 벌어졌던 일은 모르는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밝혔듯, 5·18은 광주만의 민주화 운동은 아니었다. 전국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5월 27일, 광주는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 참상을 알리고 함께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신흥고 학생들도 그중 하나였다.
출연자들도 자신들이 했던 일이 과연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다. 취재 초반, 시위에 함께했던 징계 학생들이 다시 한번 모이는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상황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기다릴 수 있었다.
처음에 “죽은 사람도 많은데 내가 한 게 뭐가 대단하냐”라며 인터뷰조차 하지 않겠다던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하고 전북 지역 5·18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22년에는 학사 징계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보상을 신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걸 기록에 남겨야 한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무언가를 했다는 걸 남기자”라고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카메라를 들고 그 시간 곁에 있었을 뿐인데, 그 변화를 옆에서 지켜본 것—그게 내가 경험한 다큐멘터리스트의 역할이었다.
여러 인물이 영화 안에서 연결되었음에도 누군가는 그림자 속에 남았다. 이를테면 5·27 시위 당시 방송을 도왔고 마이크를 잡고 나섰으며 선생님들 앞에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 채범석 씨가 그렇다. 그와 관련해 덧붙여 주실 말씀이 있다면.
채범석은 그날 처음부터 시위를 기획하거나 주도한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일 연단에 올라 가장 오랫동안, 맨 앞에서 시위를 이끌었다. 몸이 불편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노출될 수 있었고, 권력의 폭력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앞장섰다는 사실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를 찾지 못했다. 정옥동 선생님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도 결국 그 점이다. 채범석이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기회가 된다면 그가 잘 지내고 있는지, 그때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 보고 싶고, 그 소식을 정옥동 선생님께 전하고 싶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채범석을 찾는 일이 나 혼자 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당시 시위에 함께했던 동창생들, 전북 지역의 민주화 인사들, 동문회, 교육청, 지자체, 언론, 그리고 어쩌면 당일 그 자리에 있었던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나는 어디까지나 개인일 뿐이고, 사회를 흔들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후속작으로 채범석을 찾는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그게 영화 한 편으로 가능한 일인지, 솔직히 아직 모르겠다. 다만 이 영화가 그 물음을 세상에 던질 수는 있지 않을까. 누군가 나서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영화는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 이후 거리에 나선 신흥고 동문들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5·18 민주화 운동 이후 수십 년이 지나 12·3 내란을 겪고 난 지금, 이 작품이 시민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길 바라는지.
이 영화는 원래 작년 초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12·3 내란이 모든 것을 바꿔 놨다.
그날 밤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으면서, 7년 넘게 만들어 온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묻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지금 당장 현장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2024년 12월부터 2025년 3월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한남동을 찾았고 3월에는 거의 매일 광화문에 있었다. 5·27 시위에 참여했던 신흥고 동문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기록해야 했다. 45년 전 그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나오는 장면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자꾸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12·3이 가능했던 건, 우리가 5·18을 너무 오랫동안 식상한 과거의 일로 여겨왔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 이미 끝난 일이라고. 그런데 5·18은 끝나지 않았다. 1980년에서 시작해 1987년 항쟁을 거쳐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 시간 속에 갇혀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5·18을 식상하게 보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40여 년 전 광주에서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와 직결된 이야기다. 우리가 그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한, 또 다른 12·3은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 이 영화가 그 불편한 질문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게 만든다면, 나는 그것으로 8년의 시간에 답을 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