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은인 SAVE 감독 방미리 BANG Miri | Korea | 2025 | 113min | Fiction | 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자립준비청년인 세정(김푸름) 앞에 어느 날 자신이 너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주장하는 은숙(송선미)이 나타난다. 불쑥 등장한 그는 암 수술 비용을 이유로 세정이 얼마전에 받은 자립정착지원금을 빌려 달라고 한다. 세상으로 나와 홀로 서야만 하는 세정과 막다른 세상에 내몰린 은숙. 둘의 기묘한 우정은 이렇게 시작된다.


〈생명의 은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한예종 영화과 전문사 재학 시절, 장편 시나리오 수업 과제가 있었다. 과제를 위해 그동안 스크랩해 두었던 기사를 다시 읽어 보던 중, ‘자립준비청년이 자립정착지원금 500만 원으로 자립해야 하는 현실’을 다룬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자립준비청년을 다룬 기사에는 항상 ‘자립정착지원금’이라는 키워드가 따라다녔는데 ‘정착지원금 500만 원은 어떤 의미일까?’ ‘열여덟의 나라면 500만 원으로 어떻게 자립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는 500만 원이라는 돈이 큰돈일 수도 있고, 하루만에 써버릴 수도 있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처음 떠올린 제목은 ‘500만 원으로 살아남기’였다. ‘살아남기’라는 키워드에서 ‘자립’과 함께 ‘시한부’라는 설정이 떠올랐다. ‘500만 원으로 자립하려는 자, 500만 원으로 수술비를 마련하려는 자.’ 이렇게 두 명의 캐릭터와 각자의 미션이 생겼고,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하게 되었다.

열여덟에 홀로 세상과 마주하게 된 세정의 고단한 얼굴은 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인 김푸름이 맡았다. 영화배우로 익숙한 얼굴은 아니다.

한세정이란 인물을 연기할 배우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오디션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배우를 만나지 못한 상황에서 오영주 프로듀서가 김푸름 배우를 추천했다. 자신의 감성과 생각을 직접 노랫말로 옮기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매력적인 외모와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끌려 미팅을 하게 되었다. 김푸름 배우를 처음 만난 날,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이 양갈래 머리는 세정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하며 묶고 있던 머리를 풀었는데, 왜인지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진지한 애어른 같지만 동시에 귀여운 면이 있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내가 상상한 세정의 모습 그 이상으로,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정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겼다. 김푸름 배우와 만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했다. ‘푸름이가 세정이었으면 좋겠다.’

김푸름이 새로운 얼굴이라면 은숙 역의 송선미, 현식 역의 허정도는 관객에게 익숙한 얼굴들이다. 특히 속을 알 수 없는 은숙 역을 능청스레 연기한 송선미가 인상적인데. 세정을 보듬으며 은인처럼 행동하다가 순간 사기꾼인가 의심하게 하는 은숙은 어떻게 만들어진 캐릭터인가?

〈생명의 은인〉은 은숙이라는 인물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이 은숙을 보며 ‘과연 저 여자는 누구일까?’ 라는 궁금증을 갖고 끝까지 긴장감과 흥미를 잃지 않아야 했다. 또한 영화 내내 은숙의 삶을 추적하며 발견한 그녀의 면면에서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어야 했기에, 은숙은 아주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여야만 했다. 이를 위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으레 떠올릴 법한 ‘참하고 푸근한’ 이미지는 피하고자 했다. ‘화려한 외모를 지닌 철면피지만, 언뜻언뜻 처연함이 내비치는’ 캐릭터를 구상하게 되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송선미 배우를 인상 깊게 보았다. 〈도망친 여자〉(2020), 〈탑〉(2022)에서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여유롭고 천진하게 보이면서도 어딘가 공허하고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모든 걸 내보이는 듯하면서도 사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불투명한 유리 같은 은숙을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송선미 배우를 생각했을 때, 주로 세련된 전문직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녀의 인간적이고 친숙한 면을 끌어내고 싶었다. 감독으로서의 욕심이 반영된 캐스팅이었다. 송선미 배우를 처음 만났을 때, 주변 공기가 뒤바뀌었다고 느낄 정도로 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실제로는 아주 밝고 쾌활한 성격을 갖고 계신데, 그 면이 은숙에게도 잘 스며든 것 같다.

영화에 주요 장면으로 화재 신이 등장한다. 어떻게 촬영했나?

적은 예산과 안전 문제로 실제로 불은 내어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스태프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조명과 후반작업의 힘을 빌리자는 결론이 났다. 실제 촬영에서 많은 양의 라이트를 사용해 불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했고, CG 감독과도 사전에 협의해 어떻게 촬영해야 더욱 효과적으로 화재 신을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종적으로 DI 작업까지 들어가니 실제 불이 난 것 같은 효과가 장면에서 발현되었다. 많은 스태프 분들의 노고로 이루어진 신이라 특별히 애착이 간다.

자립준비청년의 삶, 혹은 미혼모 쉼터의 모습 등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자료 조사가 필요했을 듯하다.

〈생명의 은인〉의 사건의 발단이 정착지원금 500만 원이었다면,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의 시작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나의 남편은 미혼모가 낳은 무연고 아동이다. 그를 오래 지켜보며 관찰했지만 그는 내가 익숙히 알고 있던 미디어 속에 그려진 이미지와는 달랐다. 기존의 미디어에서 ‘고아’는 주로 ‘불쌍하긴 하지만 어딘가 유별나고, 불쾌하며, 두려운 존재’로 묘사된다. 나에게는 그 잘못된 인식을 언젠가는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이를 위해 많은 양의 자료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다. 자립준비청년, 미혼모 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봤고, 자립준비청년의 제도적 현실을 다룬 기사, 인터뷰 등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거의 다 읽었다고 할 만큼 공을 들였다. 특히 자립준비청년의 다양한 사례를 다룬 『안녕, 열여덟 어른』(김성식 지음, 파지트, 2023)이라는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자립준비청년과 미혼모를 단순히 ‘사회에서 격리된 존재’로서 뭉뚱그리지 않고, 그들이 가진 개개인의 결핍과 아픔을 보다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연출자로서 〈생명의 은인〉의 세정과 은숙을 ‘사회적 소수자의 특수성’을 소비하는 기능적인 캐릭터가 아닌, ‘운명적으로 맺어진 인연을 소중히 여겼던 보통의 사람’으로서 담고자 했다.

전체 프로덕션 과정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한예종 영화과 전문사 과정의 장편 시나리오 수업 과제로 쓴 시나리오였다. 처음 쓰는 장편 시나리오였기에 제작이 될 거라는 기대 없이 그저 글로써 열심히 썼다. 그러다 한예종 전문사 장편영화 제작지원에 덜컥 선정돼 그때부터 부랴부랴 프로덕션을 준비하게 되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에는 책정된 제작비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추가 제작지원을 받기 위해서 여러 기관의 지원사업을 받으려고 고군분투했다. 당시에는 매우 고되게 느껴졌는데 돌이켜보면 이 과정 속에서 작품이 다듬어지고 많은 분들의 날카롭고 애정 어린 피드백을 받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프로덕션 기간에는 매일매일 새로운 난관을 넘어야 했는데, 감독으로서 미숙한 부분이 많았기에 단 한 회차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열정이 가득했던 스태프들의 노력과 도움으로 퀘스트를 하나하나씩 깨며 영화 촬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특히 한겨울에 진행된 촬영이었기에 모두가 추위와 싸워야만 했고 그 점이 유독 어려웠다. 포스트 프로덕션은 촬영을 마친 후 약 1년간 진행되었는데 감독으로서 편집을 직접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이다. 중간중간 좌절의 기간이 있었지만 주위 많은 분들의 피드백 덕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편집을 마칠 수 있었다. 이후에 믹싱, DI 등 후반작업자 분들이 정말 열심히 해주신 덕에 작품의 퀄리티를 높일 수 있었다. 모든 과정에서 스태프 한 분 한 분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주셨다.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영화 혹은 드라마로 다루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화제작 〈폭싹 속았수다〉(넷플릭스)에서 엄마도 집도 잃은 애순에게 작은 아버지는 “세상천지 너 반길 아랫목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랫목’은 물리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편히 마음 둘 곳을 의미할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 놓인 인물에 자꾸 마음이 간다. 내가 생각하는 ‘디아스포라’는 물리적인 터전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 둘 곳을 잃고 뿌리내릴 곳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는 사람들이다. 부모에 대한 기억을 갖지 못하고 세상에 홀로 남은 아이,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의 소식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실향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차별받는 다문화가족 등 〈생명의 은인〉에 이어 ‘디아스포라’ 상태에 놓인 이들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