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혜자, 표류기 Drifting 감독 정기혁 JUNG Kihyuk | Korea | 2025 | 123min | Fiction | 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1997년에 태어난 김혜자(정은지)는 보험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왔지만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은 그는 어느 날 고향에 들렀다 엄마 친구인 희숙 이모(김주안)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마뜩찮은 여정이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 ‘김혜자’는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생, 123비상계엄이 일어난 현재를 살아가는 계약직 노동자다. 특정한 시대를 두드러지게 강조해 영화를 설정한 이유가 있나?

마스크를 쓰고 대화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아동들의 언어 발달이 지연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러한 예처럼 크고 작은 사회적 이슈들은 우리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우리는 시대적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간다. 지금은 IMF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이겨 낸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IMF 이후 지금까지 상용근로자는 줄고 임시·일용근로자는 증가했으며, 정리해고는 더 이상 비상시적 조치가 아닌 기업 운영의 한 방식이 되었다. 주인공 혜자는 1997년에 태어나 자라며 그 시절의 그러한 후유증과 상흔이 고스란히 새겨진 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앞선 질문에 덧붙여 이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대한민국 현대사는 각 세대에게 뚜렷이 구분되는 과제를 부여했다. 생존(생계)이 절실했던 부모 세대와 달리, 그 자식 세대는 상대적인 경제적 안정 위에서 체제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실존적 고민을 키워 왔다. 이 같은 차이는 정치·경제적 변화뿐만 아니라 각 세대가 경험하고 어깨 위에 쌓아 올린 사회적 트라우마의 컬렉션에도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청년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민과 삶의 고됨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97년에 태어난 혜자의 어깨 위엔 어떤 사회적 트라우마가 쌓여 있는가? 그래서 생존을 고민하는가? 혹은 실존을 고민하는가? 그런 질문들에서 시작된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전작 〈울산의 별〉(2024)에서 극 중 오십 대 주인공은 아들딸 세대와 갈등을 겪는다. 〈97 혜자, 표류기〉의 씨앗은 그 인물들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배경음으로 123비상계엄에 관한 뉴스가 흐른다.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영화 속에서 마주했을 때, 그 동시대성에 놀라기도 했다.

〈97 혜자, 표류기〉는 97년생 이야기로 97개의 ‘원 신 원 컷’으로 구성하려고 했고 그렇게 촬영을 마쳤다. 하지만 편집 과정에서 그러한 콘셉트를 지키려는 것이 과연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좋은 것인가에 대한 길고 긴 고민이 이어졌다. 그렇게 편집 기간이 늘어나고 있던 찰나에 123비상계엄과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들은 IMF 외환위기처럼 97년생 혜자의 삶에 상흔으로 박힐 것이고, 이들 세대는 물론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각각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언어 발달의 지연을 낳았다면 123비상계엄은 또 우리의 어떤 것을 지연시킬까? 또한 그러한 장치들이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동시대를 호흡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사운드 작업 과정에서 뉴스를 더했다.

영화는 혜자와 어머니 친구 희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삶에 지쳐 머리 위에 화를 얹고 사는 혜자와 고달픈 현실에도 속정 깊은 희숙을 연기한 두 배우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다. 두 배우의 어떤 점을 보고 캐스팅하게 되었나.

정은지 배우는 단편영화 〈작품 번호 3번. 중력〉(2021)을 함께 작업했는데 이미 연기력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던 상태였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혜자 역할로 떠올린 배우 중 한 명이다. 개인적으로 연락해 공개 오디션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한 유일한 배우이기도 한데, 오디션 현장에서 함께 심사했던 심사위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혜자 역할에 캐스팅되었다. 정은지 배우에게 직접 오디션 참여를 제안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감독으로서 배우에 관한 선구안이 객관적으로 검증된 것 같아 우쭐했다. 김주안 배우는 전작 〈울산의 별〉 공개 오디션에 참여했었고, 연기력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이 뛰어났지만 이미지가 부합하는 역할이 없어 캐스팅을 하지 못해 아쉬웠다. 또다시 〈97 혜자, 표류기〉 공개 오디션에서 참여한 김주안 배우가 너무 반가웠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가 생각한 희숙과 이미지가 달랐고 연령대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오디션 현장에 직접 주름 특수분장까지 하고 참여한 열정과 적극적인 태도에 희숙 역할을 믿고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두 배우 모두 뛰어난 연기력뿐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매력을 지닌 보석 같은 배우다.

영화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할 때 콜센터는 꽤 단골 소재로 쓰인다. 또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주변인들을 찾아가 돈을 꾸는 이야기도 낯설지만은 않다. 〈97 혜자, 표류기〉만의 이야기로 변주해 내기 위해 어떤 점을 염두에 뒀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단골 소재로 콜센터 노동자를 내세워서 문제 제기를 한들 그간 뭐가 달라졌나 싶다. 고작해야 자동으로 돌아가는 ‘상담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는 읍소 멘트 하나 얻었을 뿐이다. 불현듯 무섭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러한 뻔한 소재로 그들의 삶을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그러한 반추해야 할 문제는 접어 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지상 최대의 목표는 어쩌면 그렇게 뻔하디 뻔한 소재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이야기를 ‘낯설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97 혜자, 표류기〉는 콜센터에서 일하며 고되게 살아가는 계약직 혜자가 다른 노동자들과 다른 세대의 삶의 고단함을 목격하는 과정이 큰 축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상실했다. 집을 잃었거나, 건강을 잃었거나, 신용을 잃었거나. 언뜻 혜자가 그들을 적대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성장해 나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혜자와 희숙의 여정을 통해 부산 곳곳이 등장한다. 특히 희숙의 집이 있는 영도의 풍경이 이채롭다. 이들 공간을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었나.

영화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풍광들은 바다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바다가 중심에 있지만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계층적 구조를 시각적으로 대비시키려고 했다. 한 도시 안에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배경으로 보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기도 힘든 달동네의 골목을 보여 주기도 한다. 부산은 산이 많아서 부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형편이 넉넉한 이들은 평지에 건물을 쌓아 올려 바다가 보이는 높은 곳에 주거하려고 하고, 반대로 넉넉하지 못한 이들은 산꼭대기로 밀려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돈을 빌리기 위해 부산 이곳저곳을 떠돌며 영화는 수많은 노동 현장을 보여 주고, 다양한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의 모습을 비춘다. 전작 〈울산의 별〉과 함께 노동자들의 삶에 천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로 살아간다. 나 역시 영화를 만드는 노동자다. 표면적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노동자라는 계급으로 살고 있고,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갈등하고 적대시하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노동자 계급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러한 영화를 만들게 하는 동력이다.

〈울산의 별〉은 중년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 ‘여성과 노동’에 특히 주목해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모두 노동자라는 동질감에서 비롯됐다. 반면 여성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3녀 1남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떤 방식으로든 특권을 누리며 자라 온 태생적 한계(?)를 가진 사람이다. 여러 이유가 반성을 시작하게 만들었지만 너무 긴 이야기이니 각설하고, 눈앞에서, 가족 안에서,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을 어머니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들이 겪어 왔고 겪고 있는 불합리를 불과 몇 년 전에야 희미하게나마 깨달은 것에 대한 부채 의식이 있다. 이것이 지속적으로 여성 서사를 영화로 제작하는 이유인 것 같다.

반지하에서 강남의 고층 오피스텔로 수직 상승하길 바랐던 혜자는 결국 트럭 운전자가 되면서 위가 아닌 옆으로, 즉 상승이 아닌 자신의 반경을 넓히는 것을 택한다. 혜자의 마지막 선택에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나.

혜자는 수직적 상승보다 수평적 확장을 택한다. 트럭이라는 ‘달리는 갑옷’ 이미지로 재장전한 혜자를 통해 그의 사회적 저항 의지와 투쟁의 방식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조명해 왔다. 향후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시나리오는 계속해서 쓰고 있고 이미 쓴 시나리오도 여러 편 있다. 그중 차기 작품으로 고심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두 개인데, 하나는 유명 배우를 꿈꾸는 삼십 대 후반 여성의 욕망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칠십 대 여성의 삶을 통해 노인 문제를 다루는 시나리오다. 여성이라는 키워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제작한 두 작품과는 다르게 노동자라는 계급적 이슈는 비교적 보이지 않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지금도 다음 작품으로 둘 중 어떤 걸 할지 고심하고 있으며, 아마도 의식적으로 여성 서사를 다루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