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비소리 Sumbisori 감독 이은정 LEE Eunjung | Korea | 2025 | 91min | Fiction | 한국경쟁 Korean Competition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인 제주로 돌아온 해진(이선빈). 바다는 너른 품으로 그를 감싸지만 엄마 옥란(서영희)은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설상가상, 언제나 해진 편인 할머니 강자(김자영)도 치매 진단을 받는다. 폭풍 전야의 이들에게 과연 따뜻한 햇살이 비칠까? 제주를 배경으로 해녀 삼대의 삶을 담아낸 이은정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고강자, 김옥란, 구해진을 잇는 해녀 삼대의 이야기다.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처음부터 삼대는 아니었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거기에 해녀라는 직업이 합쳐지면서 자연스럽게 모녀 삼대로 확장되었다. 오래전 제주에서는 해녀 엄마를 보고 자란 딸들은 가업을 잇듯 해녀가 되었다. 대물림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 가족이어도 그 생각은 가지각색이고, 그런 다양한 시각을 다양한 인물들이 표현해 주길 원해 삼대 설정을 내세웠다.
김자영, 서영희, 이선빈. 세 배우의 연기 합이 조화롭다.
세 배우 중 이선빈 배우가 가장 먼저 캐스팅됐는데, 그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로 간절히 원했다. 그녀를 원한 가장 큰 이유는 단단함. 뿌리가 단단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결국에는 일어서고 마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반짝거림. 자꾸만 쳐다보고 싶은 사람이었고, 〈숨비소리〉의 구해진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 캐릭터 중 갈등 요소가 가장 많은 역할이 서영희 배우가 맡은 김옥란이다. 중간 세대로서 딸과 엄마, 위아래 모두와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문제까지 안고 있는 어려운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를 찾고 있었고, 그때 서영희 배우를 만났다. 실제 나이보다 더 연배가 있는 역할이지만, 그가 걸어온 길을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이 역할을 잘 표현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해녀는 할머니들이 많지만 굉장히 터프한 직업이다. 잠수복을 입은 전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막상 뭍에서 만나면 한없이 여성스럽기도, 때론 귀엽기도 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강자 캐릭터가 그러길 바랐고, 내가 봤던 김자영 배우가 그러했다. 카메라 안에서는 거침없이 연기하시는데 밖에서는 또 굉장히 ‘러블리’ 하다. 조수 생활할 때 함께 일하며 느낀 에너지가 좋았기에 선택에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제주 사투리까지 하실 수 있다는 건 캐스팅을 결정하고 난 후에 알게 됐다.
이선빈 배우가 연기한 해진은 술을 잘 마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속 ‘소희’ 캐릭터가 자연스레 떠오를 수밖에 없는데, 중복되는 이미지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해진은 술을 좋아하지만 술 때문에 실수도 저지른다. 술 때문에 용기를 얻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친목을 도모하기도 한다. 비단 해진뿐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들에게 술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 안에 해진도 존재하는 것 같다. 〈술꾼도시여자들〉은 정말 재밌게 봤던 드라마다. 이선빈 배우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 준 드라마이기도 하고. 중복되는 이미지에 부담을 느끼진 않았다. 〈술꾼도시여자들〉의 소희도, 〈숨비소리〉의 해진도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십 대이기 때문에 비슷한 결이 있지만 둘은 다른 이야기이고, 캐릭터의 갈래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해녀의 일상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취재가 상당히 필요했을 것 같은데. 제주 방언부터 해녀의 삶까지, 디테일한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어떤 것들을 준비했나.
해녀와 제주를 다룬 다양한 콘텐츠를 공부했다. 검색해서 나오는 영상들은 거의 다 본 것 같은데, 다큐멘터리가 특히 도움이 되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이 알고 싶어 해녀학교에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실제 해녀를 할 사람을 뽑는 것이어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 만난 해녀 회장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제주 방언은 제주 출신의 스태프와 배우 들이 참여하면서 그들의 힘으로 영화에 담겼다. 말의 힘이 대단함을 새삼 느꼈다. 제주 방언이 영화에 담기는 순간 생동감이 확 살아났다.
로케이션을 어떻게 했는지도 궁금하다. 주요 공간으로 해녀들이 모여 물질하는 바다, 모녀 삼대의 집과 어촌계 풍경, 해진 친구의 카페 등이 등장한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관광지로서의 제주가 아닌 도민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평선을 살리는 것. 수직적인 도시와 달리 제주의 매력은 수평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바다, 낮은 돌담, 단층 건물, 밭 등의 수평선을 보여 줄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 두 가지 기준을 갖고 로케이션을 진행했는데, 시내에서 가까운 곳은 개발된 곳이 많아 제주에서도 가장 서쪽인 한경면으로 가게 됐다. 동네가 정말 매력적이다. 제주의 전통적인 가옥 양식을 갖고 있는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삼대가 살고 있는 집이 그러하고, 카페 역시 그런 형태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어촌계 풍경은 제주의 동쪽 끝 하도에서 촬영했다. 하도의 가장 큰 매력은 바다와 해녀들의 길이었다. 바다로 연결된 해녀들의 길이 현무암 사이사이로 곳곳에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촬영할 곳을 찾아다녔다. 이 외에도 한림, 애월, 돈내코, 제주대 병원 등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촬영했다.
제주는 궂은 날이 많아 영화 촬영이 쉽지 않다. 영화 속에서도 험상 궂은 날씨가 자주 등장하는데. 촬영에 어려움은 없었나.
제주의 다양한 날씨를 담는 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의도가 있었다. 우리의 일상에 맑은 날만 있지 않고, 해녀들의 생활에 날씨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크랭크인은 2023년 3월 12일에 했는데, 첫날부터 비바람이 몰아쳐서 스태프와 배우 들이 정말 고생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바람이었다. 화면 안에서는 평화로워 보여도, 밖에서는 바람을 막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럼에도 40여 일 동안 수중 촬영과 서울 1회차까지 총 23회차 스케줄을 지연 없이 마무리했다. 날씨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 나간 스태프들의 뛰어난 역량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중 촬영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어떤 기술적인 과정을 거쳤는지 상세하게 알려 준다면?
생생한 제주의 바다를 담고 싶어 세트 촬영을 하지 않고 100퍼센트 실제 바다에서 촬영했다. 많은 촬영 답사를 다녀 봤지만, 수중 답사를 다닌 건 처음이었다. 실제 배우들이 들어가 촬영해야 했기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수면 장면은 배우들이 대역 없이 소화했고, 잠수를 하는 장면은 대역 배우와 함께 촬영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예산에 비해 카메라 하우징 등의 고가 장비가 투입됐고, 수중 촬영에 대한 경험치와 이해도가 높은 촬영 스태프들이 함께했다. 그럼에도 실제 바다 촬영은 파도가 세서 위험하기도 하고, 3월의 수온은 정말 낮고 수중 시야는 복불복이라 촬영이 쉽지 않았다. 한 컷 한 컷이 너무 귀하고 소중했기에 수중 촬영의 대부분 컷을 쓰려고 했다. 이선빈 배우는 〈숨비소리〉 촬영을 위해 수영을 배웠다. 배운 지 한 달도 안 된 초보가 헤드업 수영까지 해냈다. 심지어 바다에서. 수영 천재다.
남성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조연에 머문다. 대신 영화는 세 주인공과 해녀 공동체의 연대를 보여 주는 데 집중한다. 여성 연대를 부각함으로써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가 있다면?
일부러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의 직업이 해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의 연대가 부각된 것 같다. 함께 생활 터전을 꾸려 나가며 공동체가 가장 우선시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해녀들의 일은 단순히 물에 들어가 생물을 잡아 오는 것만이 아니다. 매일매일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 간다. 그런 두려운 일은 혼자서 해내기 어렵다. 의지하고 연대하는 누군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세 모녀는 각자 어려움을 갖고 있다. 또한 해녀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고달픈데, 고통을 드러내기보다 순간순간의 반짝임을 부각한다. 덕분에 영화 전체 톤도 밝다. 이러한 분위기를 설정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이 말은 〈숨비소리〉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데, 내가 바라보는 인생이 그런 것 같다. 힘들다 힘들다 해도 결국에는 삶 속에 빛나는 한 조각을 찾아 버텨 내는 것. 그리고 해학과 유머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서툴러 작품에 많이 담아내진 못했지만, 지향하는 바이다.
영화 혹은 드라마로 이야기하고 싶은 다른 주제가 있다면?
최근에 쓰기 시작한 것은 ‘시간’에 관한 것이다. 과거에 빚을 진 채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개념적인 이야기라 모호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관객들이 사랑할 만한, 영화관에서 보고 싶고 티켓값을 아까워하지 않을 만한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