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디바가 되고 싶었다. 영화 〈파르테노페〉는 한 디바의 일대기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파르테노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유혹하지만 거절당한다. 거절의 모욕감을 견디지 못한 그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 영화에서 파르테노페는 자살하지 않고 살아간다. 

 

10대의 한 여름, 나폴리에 사는 파르테노페, 남자 친구, 오빠는 카프리섬으로 향한다. 그들은 함께 춤을 추고 키스를 나눈다. 파르테(파르테노페의 애칭)를 성적으로 원하는 오빠는 자기 여동생이 남자 친구와 함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둘의 아버지는 오빠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걔는 나를 닮아 연약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견디지 못하지.” 파르테가 남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사이, 오빠는 그들로부터 빠져나와 높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남자 친구는 죄책감을 안고 나폴리를 떠난다. 파르테노페는 그를 붙잡기 위해,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그의 미래가 뻔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남자 친구는 뻔할지라도 진실을 원한다. 그 진실이란 그들이 한 사람의 죽음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입장에서 파르테는 특별한 주목을 받지만 죄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한 사람이다.

 

나폴리의 옛 이름을 물려받은 파르테노페는 이 도시의 인간적인 현현이고, 나폴리의 어두운 면들─그의 오빠가 말했듯 너무도 아름다운 도시이기에 행복해질 수 없는 나폴리인의 삶─또한 그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통해 드러난다. 부덕과 권태를 모른 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폴리를 떠난 사람들은 오로지 행복과 사랑만을 외치는 나폴리인의 위선을 경멸한다. 

 

오빠가 죽고 남자 친구가 떠난 이후에도 파르테는 우울하고 아름다운 나폴리에 남아 있다. 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류학 전공 지도 교수다. 교수는 파르테가 자신을 이어 교수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나폴리를 떠나 북부 도시에 유학을 다녀오라 권하지만 파르테는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파르테가 상아탑으로 향하기로 개심하는 순간은 문제적이다. 교수는 소문만 무성한 자기 아들을 보여 준다. 아들은 오로지 ‘물살’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아이다. 집안의 거대한 소파에 앉아 수액을 맞으며 TV 쇼 농담에 깔깔거린다. 파르테는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정말 아름다워요.” 교수가 답한다. “물과 소금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이 대사의 속뜻을 나는 이렇게 유추한다. 교수의 아들 또한 파르테노페와 같은 나폴리(바다)의 현현이라는 위상학을 감독은 갖고 있다. “Ciao(안녕).” “Ciao(안녕).” 나폴리의 너무도 다른 두 현현은 거울을 보듯 인사를 나눈다.

나는 소렌티노의 영화에 늘 매혹됐다. 풍경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자기모순에.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이 각자에게 없는 지혜와 아름다움을 탐하고 거래하며 성장하고 죽어 가는 모습에. 아름다움과 지혜 중 무엇을 선택할지 자문했을 때 나는 늘 지혜 쪽이었다. 아름다움이 이미 내게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시를 쓰지 않고 진짜 디바가 되었을 거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아름다움을 통해 지혜로운 이들과 연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차라리 감독의 입장에 서는 편을 택했다. 이탈리아의 한 유미주의자 아저씨의 눈으로 내가 통과하고 있던 20대의 젊음을 거리 두고 바라보며 지혜를 얻었다는 착각에 빠졌다.

 

아름다움과 교환 가능한 지혜라면 진정한 지혜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 또한 마찬가지다. 감독은 젊음과 늙음이 담보하는 가치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성찰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소렌티노의 영화에서 그 무상함이 단출하게 표현된 적은 없다. 모든 장면이 매끄럽고 화려하며 나는 그걸 좋아해 왔다. 이 취향은 창작에도 반영돼 내가 무슨 메시지를 전하든 일단 시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의로 이어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게 시 쓰기란 아름다움이라는 환각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당시 나는 스무 살이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었지만

꿈을 얻었다. 

꿈을 가졌으니 

다른 것은 상관없었다. 

일도 기도도 하지 않았고 

새벽녘에 낭만적인 

개들 옆에서 공부를 하지도 않았다. 

꿈은 내 영혼의 빈터에서 살았다. 

열대의 어느 허파 깊숙한 곳, 

어스름이 짙게 깔린, 

목제 침실. 

이따금 나는 꿈을 찾아 내 안으로 

돌아가곤 했다: 액상의 생각들로 

영원화한 조각상, 

사랑 속에서 몸을 뒤트는 하얀 굼벵이. 

고삐 풀린 사랑. 

다른 꿈 속의 꿈. 

이윽고 악몽이 내게 속삭였다: 넌 성장할 거야. 

고통과 미로의 환영을 뒤로하고 

넌 잊을 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성장하는 것은 죄악이었으리라. 

나는 말했다, 난 낭만적인 개들과 여기에 있어 

그리고 계속 여기에 머물 거야. 

―로베르토 볼라뇨, 「낭만적인 개들」, 『낭만적인 개들』, 김현균 옮김(열린책들, 2018)  

 

이 장면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보기 위해 시를 쓰기도 했던 것 같다. 낭만적인 개들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나오는, 시를 적은 꼬깃꼬깃한 종이를 품은 채 어른 시인들과 우당탕 맞서는 세 주인공의 은유일지도. 아니면 어둠 속 빈터에 잠들어 있는 푸른빛의 야광 개일지도.

 

화자는 과연 계속 젊은이로 남았을까? 성장은 “그 시절”의 죄악이었을 뿐이고, 당시 화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20대를 통과해 온 작가-화자는 그걸 알고 있다. 정신없는 젊음, 고삐 풀린 사랑의 주인공은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성장을 죄악으로 치부하고 낭만적인 개들과 함께 영혼의 빈터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는 장면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아름다운 환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화자의 결정보다는 그걸 가능케 한 낭만적인 개들의 존재에 있다. 그것들은 이 시 속에서만 가능한 개체이고, 그래서 허구적이며, 그러나 성장했을지도 모르는 화자와 달리 스무 살의 시공간에 여전히 남아 있다. 

 

〈파르테노페〉의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은 은퇴한 노교수가 되어 나폴리로 돌아온다. 나폴리는 여전히 열정적이고 아름답다. 축구단 FC 나폴리의 우승을 기념하는 행진 속에서 걷는다. 골목에는 첫사랑의 환영이 서서 “무슨 생각 해?”라고 묻는다. 그녀가 만난 모든 남자가 물었던 질문이고, 파르테는 비밀스러운 미소만을 짓곤 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파르테가 다시 북부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 앞에 섰을 때 도로를 따라 한 척의 배가 푸른빛을 발하며 다가온다. FC 나폴리의 응원단이 타고 있다. 축구단의 응원가가 함성처럼 들려온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너와 사랑에 빠졌어.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여기에 있어. 오늘처럼 이 도시를 수비하고 있어.” 푸른빛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지고 파르테는 응원단을 바라보며 비밀스러운 미소가 아닌 투명하고 만개한 웃음을 짓는다. 

 

근친상간이라는 운명의 비극 이후 파르테노페는 나폴리를 떠나 상아탑으로 향하기를 선택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파르테노페의 떠남이 아니라 응원가의 남아 있음이다. 나폴리인은 떠날 수 있지만 나폴리의 응원가는 나폴리를 떠날 수는 없다. 응원가에 있는 나폴리에 대한 사랑은 나폴리가 생겨날 때부터 태어난 거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가 버리든 버리지 않든 그대로 남아 있다. 

 

두 작품 속 ‘낭만적인 개들’과 ‘나폴리의 응원가’가 내게 알려 주는 건 이렇다. 우리가 한때 사랑했다고 추억하는 대상들이, 우리의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거기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의 존재는 우리의 사랑과 큰 상관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사랑했던 게 아니고 그 사랑 속에 잠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사랑했던 것이 우리 앞에 불쑥 등장할 때,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갖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 순간 주장해 버린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아직도 남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