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넘게 이어진 월드컵이 이제 결승을 코앞에 두고 있다. ‘스포츠와 영화’라는 주제를 받아 들고 앉은 지금, 월드컵을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스포츠 중계는 오래전부터 영화 비평가들에게 매혹적인 소재이기도 했다. 영화 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리베라시옹』 지면에 10년 치 테니스 관전기를 남겼고, 테니스 중계를 당대 브라운관에서 가장 풍부한 볼거리로 여겼다.1 그 가운데 가장 큰 무대는 언제나 월드컵이었다. 왜 올림픽이 아니라 월드컵인가. 올림픽은 수십 개의 경기장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종목들의 박람회다. 각국의 시청자는 제 나라 선수가 나오는 종목의 화면 앞으로 흩어지고, 세계가 함께 보는 듯하지만 대회의 이미지는 나라마다 다르게 편집된다. 물론 올림픽에도 수렴의 순간이 없지는 않다. 남자 100미터 결승쯤 되면 지구의 화면들이 잠시 한 트랙을 향한다. 다만 그 합류는 10초 만에 끝난다. 반면 월드컵은 한 달의 대회 전체가 끝내 하나의 경기로 수렴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결승 90분 동안 지구의 화면들은 사실상 같은 경기를 튼다. 게다가 축구는 광고가 끼어들 틈 없이 45분을 통째로 흘려보내는, 전파를 타는 스포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끊기지 않는 시간을 지닌 종목이었다. 공 하나를 두고 국가와 국가가 이토록 진심이 되는 대회는 달리 없고, 그 진심이 4년마다 사람들을 화면 앞으로 불러 모은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보며 축구가 아니라 축구 중계의 미장센을 물었다.2 스물다섯 대의 카메라, 상상선의 규칙, 삽입 화면이 만들어 내는 드라마, 되돌린 시간으로서의 느린 화면. 말하자면 월드컵은 영화 비평을 하는 이에게 축구를 영화처럼 감상토록 하는 유혹을 지닌 텍스트였다.

 

이 성실한 분석들만으로는 모자란 상황이 벌어졌다. 그사이 TV와 월드컵 중계 환경이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TV는 더 이상 거실 한구석에 정착해 있지 않다. 월드컵은 TV와 라디오의 전유물이기를 그만두고 화면과 와이파이를 가진 기기라면 어디서든 꺼내 볼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지금 내 앞의 월드컵은 이전 세대 비평가들이 마주하던 프로그램이 아니다. 중계 규칙 역시 점차 변모했다. 규칙이 바뀌는 동안 무언가는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월드컵이라는 이미지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를 영화와 함께 생각할 때, 이상하게도 히말라야의 작은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키엔체 노르부의 〈컵〉(1999). 여담이지만 이 영화를 국내에서는 도무지 구할 길이 없어, 동유럽 사이트를 뒤져 헝가리어 자막이 붙은 판본을 겨우 찾아 보았다. 〈컵〉을 간직해 준 이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한다.

 

〈컵〉은 인도의 티베트 망명 사원 마당에서 삭발한 어린 승려들이 승복 자락을 걷어붙이고 콜라 캔을 차며 시작한다. 나를 가장 오래 붙든 장면은 안테나를 둘러싼 소동이 아니라 이 첫 풍경이었다. 이는 발로 찰 수 있는 사물과 사람, 그리고 충분한 공간만 있다면 축구가 어디서든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승복 밑에 받쳐 입은 유니폼, 경전 옆에 쌓인 축구 잡지, 벽에 붙은 호나우두와 지단의 사진. 아이들은 경기 영상 한 번을 온전히 본 적 없이도 이미 축구라는 세계의 주민인 셈이다.

 

이 아이들이 월드컵을 응원할 때 부재하는 건 바로 응원할 국가다. 티베트에는 축구 대표팀이 없다.3 열네 살 오겐은 그럼에도 호나우두가 출전하는 결승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월드컵을 곧잘 내셔널리즘의 텍스트로 간단히 비판하지만, 오겐은 그 내셔널리즘을 제가 보고 싶은 중계를 얻어 내기 위한 협상의 도구로 쓴다. 주지 스님 앞에서 티베트와 프랑스의 관계를 꺼내 드는 것이다. 프랑스가 티베트의 대의를 지지하기에 결승만은 꼭 보아야 한다는 거짓말. 국가를 잃은 아이가 남의 나라 지정학을 잠시 빌려 와 욕망의 통행증으로 쓰는 셈이다. 욕망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호나우두와 지단, 소문과 사진만으로 국경을 넘어온 얼굴들에 있어 보인다. 오늘날 아이들 방 벽에도 음바페와 메시가 붙어 있을 것이다. 달라진 쪽은 스타의 자리가 아니라 신호의 자리다. 이 변방에서 아이들은 증명한다. 축구를 보고 싶다는 마음은 국민이기 이전에 축구를 하는 몸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서 성립한다.

 

〈컵〉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축구에 미친 어린 승려들이 큰스님들 몰래 밤마다 담을 넘어 이웃 마을에서 월드컵 경기를 훔쳐보다가, 결승만은 사원 안에서 보겠다고 위성 안테나를 빌리러 나선다. 사원은 축구를 금한다. 그런데 이 금기는 어딘가 이상하다. 티베트라는 국가의 존재 자체가 중국에 의해 통째로 금지당하는 마당에, 금지당한 자들이 담장 안에서 금지를 반복하는 셈이니까. 그래서일까. 큰스님들은 끝내 아이들이 결승 보는 일을 허락한다. 문제는 대여료다. 오겐은 돈을 모으다 모자라자 신참의 시계를 저당 잡힌다. 신참은 중국의 서슬을 피해 어머니가 국경 너머로 보낸 아이고, 그 시계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쥐여 준 물건이다. 이 영화의 결승전은 이상한 이중 상영이 된다. 모두가 프랑스와 브라질을 보는 동안, 오겐 혼자 신참에게 시계를 돌려주기 위해 저당값을 구하러 다닌다. 그러다 결국 그 궁리를 큰스님에게 들키고 만다. 오겐이 제 축구화라도 팔겠다고 내놓자 큰스님이 말한다. 너는 장사에 소질이 없으니 좋은 불자가 되겠구나.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순간의 오겐이야말로 이미 불자처럼 굴고 있다. 그토록 보고 싶던 결승을 스스로 등지고 남의 시곗값을 구하러 다니는 일. 농담처럼 던져진 큰스님의 말은 그 밤에 벌써 실현되고 있었던 셈이다. 스님이라는 존재는 유혹을 어떻게 떨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인다. 불자가 아닌 내 눈에는 그랬다. 승복 아래 노란 민소매를 호나우두 유니폼처럼 색칠해 입고 다니던 아이, 호나우두 사진을 가리키며 머리는 밀었어도 스님은 아니라고 우기던 아이는 그날 밤 호나우두가 예비 대머리에게 질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1998년 7월의 결승은 지단의 것이었다.

 

“경기장 안은 정정당당한 실력을 요구하지만, 경기장을 보는 것은 돈의 문제이다.” 정성일의 글에서 내가 다시 꺼내 드는 대목은 바로 이 한 줄이다. 경기와 관람 사이의 돈 문제를 2006년에 그는 형식 차원에서 물었다. 2026년에 나는 같은 문제를 소유 차원에서 이렇게 묻게 된다. 월드컵이란 국민이라는 공동체가 축구를 영화로 보는 시간이 아니냐고. 다만 여기서 영화는 몽타주의 이름이 아니다. 평론가 배은열은 극장이 영화를 틀어 주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몸과 시선과 시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장치”였다고 쓴다.4) 어두운 공간에 모여 앉아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곁의 관객들과 함께 웃고 긴장하고 침묵하는 일. 영화는 그 조건 안에서 공동의 경험을 생산해 왔다는 뜻이다. 그 장치는 주류에서 밀려났고 관람은 각자의 화면과 각자의 배속으로 흩어졌다. 4년에 한 번 수백만 명을 같은 시각 같은 화면 앞에 소집하는 행사는 이제 월드컵 말고 거의 남지 않았다. 월드컵이 영화적인 까닭은 영화를 닮아서가 아니다. 월드컵은 영화가 잃어 가는 ‘함께 봄’이라는 가치를 잠시 맡아 두는 임시 극장 역할을 해왔다.

 

그 임시 극장의 흥행권을 이번에 JTBC가 통째로 사들였다. 약 1,887억 원. 지상파 공동 협상체를 우회한 단독 입찰이었고, 자금 사정 탓인지 손에 넣은 신호는 4K가 아니라 HD였다. 비싸게 산 신호는 제값에 되팔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이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자 내기의 정체가 드러났다. 1,887억은 축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서사에 걸린 돈이었다. 국민이 모이는 시간을 통째로 사들였는데, 홍명보호가 그 기대를 무참히 부숴 버렸다. 탈락 이후에도 눈앞에는 세계인의 축제가 통째로 남아 있었다. 카메라는 잠시 축제를 떠났다. 홍명보 감독의 사퇴 기자 회견장으로, 책임 공방으로, 대표팀의 장례 절차로 갔다. 국민 서사 하나만 바라보고 꾸려진 중계였으니 그 서사가 끊기자 세계 최대의 축구 대회를 눈앞에 두고도 그들은 갈 곳을 잃었다. 남의 나라 잔치를 축제로 중계할 언어도, 해설의 감정선도, 광고를 팔 명분도 애초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장례가 내내 이어지지는 않았다. 길어야 며칠이었다. 다만 그 며칠 동안 방송도 시청자도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였다. 정작 대회는 마법을 멈춘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카보베르데는 아르헨티나를 연장까지 끌고 가는 혈투를 벌였고, 연장에서 환상적인 동점 골을 터뜨린 카브랄은 연인을 찾아 관중석으로 뛰어들었다. 사원의 아이들이라면 결코 놓치지 않았을 순간들이 국민 서사 바깥에서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남의 나라 스타만으로 축제를 성립시켰다면, 이쪽은 정확히 그 반대의 불능이다. 관람을 위해 저당 잡힌 자와 소유를 위해 판돈을 건 자. 무너진 쪽은 후자다. 2026년 6월, 갚지 못한 채무와 함께 이 방송사는 회생 절차 앞에 섰다. 신호를 소유하려던 쪽이 신호의 무게에 깔렸다.

 

우리는 유례없이 좋은 환경에서 축구를 본다. 채널을 오가며 발을 구를 것도 없이, 두 경기가 동시에 열리면 멀티 뷰가 두 화면을 나란히 띄워준다. 그런데 이 풍요의 한복판에서 정작 시청의 밀도는 착실히 옅어지는 중이다. FIFA는 이번 대회부터 전 경기 각 하프 중간에 3분짜리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즉 수분 보충 휴식을 넣고, 사상 처음으로 그 시간에 광고를 허용했다. 명분은 선수 보호다. 그러나 이 휴식은 날씨와 무관하게 매 하프 같은 시점에 찾아온다. 광고가 끼어들 틈 없이 흐르던 45분, 축구 중계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그 끊기지 않는 시간이 이번 대회로 공식 폐기된 셈이다. 축구는 사실상 쿼터제 종목으로 개편되었다. 나는 에콰도르 대 독일 경기에서 해설자가 후반을 “3쿼터, 4쿼터”라 부르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 광고 단위가 경기의 시간 감각을 재편성하고, 그 재편성이 중계의 언어에까지 스몄다. 애국가가 끝나고 선수들이 제자리로 흩어지는 동안의 짧은 정적마저 이제 광고가 차지한다.

 

독일의 영화감독 하룬 파로키는 2006년 월드컵 결승을 열두 화면으로 쪼개 원본 중계 곁에 선수들의 궤적과 통계와 막대그래프를 나란히 내건 설치 작품 〈딥 플레이〉를 남겼다. 그것이 사건보다 사건의 수치화가 화면을 장악해 가는 중계의 예고편이었다면, 우리는 그 본편을 산다. JTBC는 한국이 실점하자마자 화면에 통계를 띄웠다. 한국이 역대 대회 후반전에 골을 많이 넣었다고, 동점 골이 유난히 많았다고. 자랑은 아닌 것 같다. 그 숫자들은 경기 분석이 아니라 등을 돌리려는 국민 시청자를 붙잡는 주문에 가까웠다. 화면 위에서는 사건이 수치로 번역되고 화면 바깥의 시간은 광고 재고로 쪼개진다. 경기의 연속성을 훼손하는 삽입 화면을 다네가 중계의 사기라 불렀다면, 22분마다 규정으로 경기를 끊는 이 편성은 사기의 상설화에 가깝다. 미국 프로 레슬링 중계는 경기 중에도 화면 귀퉁이에 광고를 띄운다. 축구의 다음 순서가 그것이리라는 불안은, 그러니 기우가 아니다.

 

월드컵이라는 형식의 원래 모습을 〈컵〉의 마지막 장면은 기억하고 있다. 온 사원이 흑백 TV 앞에 모여 앉는다. ‘다시 보기’도 저마다의 화면도 없이 공동체 전원이 한 화면을 향하는 단 한 번의 상영회. 오겐이 친구에게 오프사이드를 설명해 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장면 앞에서 사사로운 기억 하나를 꺼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열 살이던 2002년 여름, 나는 스페인과 맞붙은 8강전을 마을 회관에서 보았다. 온 마을이 한 화면 앞에 모인 그날의 승부차기 함성과 회관 풍경을 지금도 세부까지 기억한다. 경기를 보며 저마다 감탄과 분노와 초조를 쏟아 내다가 이내 함께 껴안았던 그 장소를. 내게 영화 속 사원은 그날 마을 회관의 풍경을 불러온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쇠퇴를 걱정할 때, 나는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쇠퇴하는 쪽은 영화가 아니라 함께 봄이라는 형식이라고. 영화는 그 형식의 가장 오래된 세입자였을 뿐이라고.

 

그런데 정말 쇠퇴이기만 한가. 이번 대회를 나는 JTBC와 치지직을 오가며 보았다. 치지직에서 사람들은 중계방송을 그냥 보지 않는다. 스트리머와 함께 본다. 한 사람의 방에 수만 명이 모여 그의 탄식 위에 제 탄식을 얹고, 몇 초 앞선 신호를 받는 이들은 예언자처럼 다음 장면을 미리 귀띔하는 장난을 친다. 저마다의 회선으로 한 사람의 방에 모여드는, 몸의 접촉이 사라진 함께 봄. 스트리머의 방을 마을 회관의 후신이라고까지 부르지는 않겠다. 다만 함께 볼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가상 공간임은 받아들인다. 그곳에는 곁에 앉은 몸의 온기가 없다. 마을 회관의 형식은 아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애도만 할 수도 없어서, 나는 이 낯선 형식 안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한다. 몇 초의 전송 지연조차 놀이가 되는 관람이라면 거기에도 함께 봄의 몸은 아직 살아 있는 셈이다.

 

함께 봄이라는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던 사이 가자 지구에서 들려온 소식을 적어 두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 대 아르헨티나 16강전을 한 시간쯤 앞두고, 주민들을 위해 경기 상영회를 준비해 온 구호 활동가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축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덟 살, 열 살 형제도 세상을 떠났다.5 그런데도 그날 가자 시티의 건물 잔해 앞에는 대형 화면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그 위에까지 빼곡히 올라앉아 경기를 지켜보았다. 대피소가 된 학교 교실에서는 노트북 한 대가 유일한 불빛이었고, 사람들은 끊기는 인터넷 신호를 붙잡으려 애썼으며, 머리 위로는 드론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함께 봄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 내가 감히 정의 내릴 수 없는 희망이었을 테다. 이 글을 매만지는 내내 그 활동가를 생각했다. 그럼에도 경기를 보여 주고 싶었던 사람의 마음에 관하여. 그 준비가 목숨을 거는 일임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잔해 사이에 화면 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다만 내가 본 귀중한 것을 남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영화와 현실이 공명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닌지, 나는 아주 사소하게 고민해 볼 뿐이다.

 

〈컵〉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불행해할 이유가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불행해한들 소용없다는 법문이 내레이션으로 흐르는 가운데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두 아이의 뒷모습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이 결말을 보면서 JTBC 문제를 떠올렸다. 우스꽝스러운 중계 논란은 어쩌면 처음부터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 되팔기 위해 신호를 독점하지 않았으면 되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성공이라는 도박을 도박으로 여겼으면 되었다. 반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따로 있다. 물리적으로 타인과 함께 보는 일의 문제다.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다. 상사와 동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때로는 의도적으로 대놓고 경기를 보면서, 함께 볼 수는 없어도 사무실의 모두가 저마다의 화면으로 같은 대회를 보고 있음을 마음 한편으로 알고 있었다. 함께 보면서 따로 보고 있음을 인지하는 일. 내게 남은 함께 봄은 당분간 그 형태일 것이고, 불행해한들 소용없다. JTBC는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을 줬다. 신호는 사들일 수 있어도 그 앞에 모이는 마음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는 것.

 

당신이 이번 월드컵의 결승을 어느 화면으로, 누구와, 어떤 채팅창 곁에서 보았든 이것 하나는 붙들고 싶다. 함께 봄은, 월드컵이라는 이 오염된 대회에서도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희망이라는 것. 물론 안다. 안전한 회선 앞에 앉아 채팅창을 마을 회관이라 부르는 일은 어떤 면에서 기만이다. 온기가 없는 곳에 온기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고, 잔해 위에서 목숨을 걸고 화면을 지켜보는 이들 앞에서는 사치스러운 은유이기도 하다. 그 기만을 모르는 채가 아니라 인정하는 채로 걸겠다. 내게 네트워크는, 그 기만까지 감수하고서라도 여전히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을 회관이다. 마음이 있는 한 신호는 결코 끊기지 않는다. 그 마음이 보여 주려는 마음인 한.


 

 

  1. 세르주 다네의 텔레비전 스포츠에 관한 글들은 사후 전집 『La Maison cinéma et le monde』(P.O.L, 2001~2015)와 테니스 산문집 『L’Amateur de tennis』(P.O.L, 1994)에 수록되어 있다. 
  2. 정성일, 「월드컵의 미장센」, 『씨네21』, 2006. 7. 19. 
  3. 영화 속 1998년 기준 서술이다. 티베트 망명 정부 대표팀은 2001년에 첫 국제 경기를 치렀으며, 국제축구연맹(FIFA) 소속이 아닌 독립축구협회연맹(CONIFA) 주관 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4. 배은열, 「왜 지금 다시 〈역마차〉인가 — 메인 라인을 잃어버린 영화사에서 고전을 통과한다는 일」, 네이버 블로그, 2026. 6. 7.(https://blog.naver.com/raccoon0214/224308793291 
  5. 가자 지구의 월드컵 상영회와 공습 관련 사실은 『가디언』과 로이터 통신의 2026년 6~7월 보도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