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희곡을 쓰게 된 건 비극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극에 매료된 이유는 내가 겁쟁이기 때문일 테다. 대부분의 겁쟁이들이 그렇듯 나는 각종 불행으로부터 나를 과잉보호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날까 봐, 자동차가 급발진을 할까 봐,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재활용할까 봐, 장례식장에서 귀신이 붙어 올까 봐 걱정한다. 나는 언제나 경미한 신경 쇠약 상태다. 반면 불행의 주동자가 되는 상황을 상상하며 벌벌 떨기도 하는데 그건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꿈에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출근을 한다. 퇴근 뒤 돌아온 차 안에 아이는 질식한 채로 죽어 있다. 또는, 친구와 물놀이를 한다. 친구가 물에 빠진다. 도움을 청하러 마을을 향해 달린다. 그 길로 집에 돌아가 편안히 잠든다. 다음 날 친구의 시체가 떠오른다······. 끔찍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나의 멍청한 선택이 세계를 붕괴시켰다는 죄책감으로 옮아간다. 내 생각에 겁쟁이는 자신의 선택이 초래할 불행에 미리 죄책감을 느껴 모든 선택의 권력을 자기 바깥으로 내어준 이들이고, 그렇기에 자신이 살찌운 팽창된 세계를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1881년에 쓰인 헨리크 입센의 비극 〈유령〉은 불행에 대한 두 가지 각본을 충돌시킨다. 일찌감치 집을 떠나 파리에서 살고 있는 오스발 알빙은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고백한다. 의사는 그의 병이(매독으로 암시된다) 아버지의 죄가 대물림된 것이라고 진단하지만 오스발은 부정한다. 아버지는 왕실의 의전 장관이자 존경받는 자선 사업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확신하곤 울부짖는다. “완치될 가망이 없대요. 차라리 유전이었다면 덜 괴로웠을까요? 운명이 준 불행과 내가 초래한 불행 중 무엇이 더 나쁠까요?” 알빙 부인은 아들의 자책을 덜어 주고자 평생 숨겨 온 진실을 털어놓는다. 네 아버지는 하녀를 겁탈해 혼외자를 두었고 불륜을 일삼았으며 무능력하고 폭력적인, 끔찍하게 병든 인간이었다고. 따라서 그 병은 네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운명에 의한 것이라고.
종일 비가 내리는 노르웨이의 음산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희곡은 한 집안과 사회에 유령처럼 스며든 폐습을 지적하며 당시 유럽 사회에 퍼져 있던 계몽적 가치를 설득하는 듯 보인다. 독자는 〈인형의 집〉 노라를 응원하듯 알빙 부인의 해방을 응원한다. 그러나 〈유령〉을 개인의 자유가 운명과 맞서는 이야기로 읽는다면 금세 단순성의 벽에 부딪힐 것이다. 이 작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의 중요성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유의 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희곡의 말미에 이르러 오스발은 어머니에게 자살을 도와달라 부탁한다. 알빙 부인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모르핀을 투약하면 아들을 살해하는 꼴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들은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들의 생명과 자유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낡은 인습과 싸워 얻은 자유는 곧 자신을 옭아매는 결과로 돌아온다. 희곡은 불행의 각본을 개인의 과실에서 운명에 의한 것으로 다시 쓰는 듯 보이지만 또다시 개인의 손에 선택지를 쥐여 준다.
아리 애스터의 2018년 작 〈유전〉은 자유와 운명의 대립이라는 비극의 유구한 양식을 계승한다. 영화는 피터의 수업 장면을 빌려 그리스 비극을 인용하는데, 추측건대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의 여인들〉일 것이다. 교사는 묻는다. “헤라클레스는 선택권이 없었어. 선택권이 있었다면 더 비극이었을까? 덜 비극이었을까?” 누군가 답한다. “더 비극 같아요. 모두 필연적인 일이라면 인물들은 희망이 없잖아요. 희망이 없으면 아무 기대도 없고 가망 없는 체스판의 말 같은 존재니까요.”
선택의 부재가 비극을 완화한다는 이 문답은 비극에 대한 〈유전〉의 가설 같다. 이에 응답하듯 영화는 찰리의 죽음을 선택권이 없었던 비극으로 변모시킨다. 영화는 악마 소환에 한 가정이 희생되는 단일한 플롯을 보여 주지만 기실 찰리의 죽음을 기점으로 또 하나의 각본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남겨진 이들의 일상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과실을 범한 이들, 그리하여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린 이들이 형벌처럼 견뎌야 하는 시간 말이다. 이들의 일상은 마술적이거나 영적이지 않다. 원망과 죄의식, 실패한 애도로 점철된다. 인간은 이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애니는 찰리의 죽음을 운명의 서사로 다시 쓴다. 운명이라는 유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알빙 부인과 달리, 애니는 기꺼이 유령을 받아들인다. 아니, 불러낸다고 해야 맞으리라. 애나는 말한다. “난 영매야. 전에는 유령이 보여도 내쫓으려 했지만 이젠 아니야.” 피터의 대관식 장면에서 불행의 각본은 개인의 과실에서 운명에 의한 것으로 훌륭하게 이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완벽한 이행은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모든 이행에는 나머지가 있다. 자신 때문에 딸이, 동생이 죽었는데 어떻게 비극의 원인을 운명에만 돌릴 수 있겠는가. 나는 애니와 피터가 파이몬에게 자아를 완전히 내맡겼다거나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교적 쉽게 죽는 스티브와 달리 두 사람은 죽음의 살아 있는 숙주로서 산 자와 망자의 중간 지대에 기거한다. 애니는 망자와 같아지기 위해 자신의 목을 반복적으로 긋고, 피터는 찰리처럼 이상한 학생이 되어 간다. 이들은 언제나 이행 중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자유로운 개인에서 운명에 지배되는 필멸자로. 그러나 두 항 중 어느 곳에도 도달할 수 없다. 애도는 결코 운명론으로 해소될 수 없으며 오직 도상(途上)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결 불가능성은 〈유령〉의 마지막 장면, 오스발이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과도 공명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시체의 모습이다.
나는 〈유전〉을 결코 위로받을 수 없는 불행을 견디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는다. 위로받을 수 없는 불행을 인간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영화에서 파이몬 왕은 가장 약한 사람을 숙주로 삼는다. 이 영화가 내게 깊은 위로를 주는 까닭은 약함이 곧 불행을 견디는 조건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유령〉의 만데르스 목사는 말한다. “인생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거, 그거 터무니없는 겁니다. 무슨 권리로 인간이 행복을 구하죠?” 비극은 삶에 겁을 먹은 이들을 위한 장르다. 겁쟁이를 진정으로 달래 주는 것은 ‘그’ 두려움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과학적이고 확률적인 세계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테리 이글턴이 말했듯, 오히려 세계가 도덕 가치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나은 세계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다. 비극은 우리에게 체념을 선물한다. 체념 속에서 우리는 약함을 옹호할 수 있다.
영화 × 연극
아리 애스터, 〈유전Hereditary〉(2018)
헨리크 입센, 〈유령Gengangere〉(18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