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트의 책 『캄포 산토』에서는 프리드리히 티베르거가 사진 확대에 쓰는 기묘한 모양의 상자를 팔 아래에 끼고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카프카를 만난 얘기가 나온다. 티베르거가 기록하기를 카프카는 놀라서 “사진도 찍으십니까?” 하고 물었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것 참 섬뜩한 짓이군요.” 또 그는 잠시 숨을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한다. “게다가 확대까지 하신다구요!” 이 얘기를 보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욕망〉(1966)이 떠올랐는데 함부로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는 것의 매혹과 공포에 대해, 주인공인 사진작가 토마스는 자신이 몰래 찍은 사진을 확대해 보다가 자신이 발견한 생각지도 못한 것에 매혹당하고 진실을 파헤치려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마지막엔 지워져 버리고 만다.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단편 「악마의 침」에서는 그 부분을 사진의 복수,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사진의 복수는 그가 그것을 들여다보며 그들 사이에 일어나야만 하는 일과 일어났어야만 하는 일을 떠올리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어지게 된다. 본다는 것은 개입하는 것이고 소설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를 우리 바깥으로 무작정 내던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매혹에 대한 집착과 상상이 결국 그를 소거해 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공도 없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토마스는 자기 쪽으로 날아온 공이 마치 정말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건네주고 카메라는 그들을 바라보는 토마스의 얼굴을 보여 주는데 그 순간 정말 테니스공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통해 우리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고 보진 않았지만 ‘일어나야만 하는 일’을 떠올리는 순간, 소거되는 것은 토마스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

 

코르타사르의 단편집 『드러누운 밤』에서 「악마의 침」보다 짧지만 이 바라봄의 문제를 더 무시무시하게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은 「아숄로뜰」인데 여기서 주인공은 파리식물원의 수족관에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아숄로뜰을 관찰하다가 아숄로뜰의 눈에서 나에게 다른 삶이 현존하며 다르게 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읽어 낸 순간 소거가 아닌 전환이 일어난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것은 바로 내 얼굴이며 나로 보이는 사람은 수족관 바깥에 있고 그를 알던 내가, 아니 그였던 내가 아숄로뜰이 된다. 눈을 마주 보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대상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눈은 통로가 되어 나를 이동시킨다. 여기서 더 무서운 것은 옆에 있던 다른 아숄로뜰을 발견했을 때 그 아숄로뜰 역시 의사소통할 방법은 없으나 명료한 의식을 갖고 있으며 아마도 나와 같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숄로뜰이 되어 버린 나는 수족관 안에서 자주 찾아오던 나였던 그를 계속 기다리지만 그의 발길은 뜸해지고 더 이상 나는 그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낀다. 그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고독 속에서 아숄로뜰이 된 내가 한 가지 위안 삼는 일이 있다면 그가 우리 이야기를 쓸 것이라는 생각이다. 스스로 표현할 방법은 없지만 명료한 정신을 가진 채 대신 내 생각을 표현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수족관 속의 아숄로뜰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화와 책에 대한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아주 오랫동안 의사소통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생각을 읽어 낸 순간, 우리는 기꺼이 소거되거나 스스로를 내던질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의사소통이 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내던지지 않으면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대상에 깊게 빠져들 때 그들은 반드시 우리의 일부를 혹은 전부를 원한다. 그 상호 작용을 거부하는 순간부터 이미지와 문학의 복수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