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가 〈라라랜드〉를 인생 영화로 꼽는다면 그건 정말 한심한 일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 부정하려 해도 끝에 가선 인정하게 되는 어떤 숙명과도 같은 일이 있다. 내겐 그게 바로 〈라라랜드〉를 인생 영화로 꼽는 일이다···.
얼빵한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로 흑인 문화를 뼛골까지 전유하는 백인 영화 〈라라랜드〉는 솔직히 어디 가서 인생 영화라고 말하기는 좀 그런, 자기 비하 하자면 ‘여성’ 전용 감정 과잉 드라마다. 재즈 전문 영화라곤 해도 거의 양념으로 등장하는 정도. 그보다는 이건,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꿈과 야망 가득했던 시절 사랑했던 두 사람이 현실에 적응하며 결국 제 갈 길 가게 되는 보편적인 망한 ‘연애’ 이야기다. 나는 이 성질 돋우도록 유치뽕짝인 뮤지컬 영화를 극장에서도 혼자 OTT를 통해서도 반복해서 봤다. 사운드트랙이야 말해 무엇하리···. 아아, 이제 어떤 곡은 전주만 시작돼도 눈물부터 왈칵 쏟아진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라라랜드〉를 좋아할까? 스스로도 수치심에 휩싸인 채 자문하길 10년째—참으로 우연히도 〈라라랜드〉 역시 올해로 개봉 10주년을 맞았다고 한다—나는 깨닫는다, 그건 아마 영화가 부린 마지막 10분의 마법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라스트 신에서 오랜 시간 서로 보지 못했던 서배스천과 미아는 우연히도—하지만 바로 그 우연 가까이로 늘 기울어져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처럼—마주친다. 우리는 이제 미아가 까칠한 서배스천과는 퍽 다른 유형의 온순한 남자를 남편으로 골랐다는 것도 알고 또한 그가 그토록 바라던 배우로서의 성공 또한 거머쥐었다는 것도 안다. 서배스천 또한 미아가 지어 준 이름으로 정통 재즈 클럽을 차렸다. 둘은 서로 ‘없이’ 각자가 소망하던 미래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렇기에, 둘이 헤어져야 ‘맞는’ 걸까? 영화는 놀랍게도 이 시점에서 우리를 둘의 최악이던 첫 만남으로 훌쩍 데려간다. 이제 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둘을 헤어지게 했던 어리석은 실수는 반복되지 않고 완벽하게 모든 것이 온전하다. 이 가능성. 이 가정법. 과거는 무궁무진하다. 현실 세계에서 둘의 때가 끝난 바로 그 시점에서 과거 둘이 함께 소망했던 미래가 가능 세계로서 복구되어 우리 앞에 가속 재생된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투둑 하고 벌어졌던 이 과거-미래는 현재 진행 중인 둘의 시간선을 절개하며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는 틈을 개방한다. ‘다른 차원’? 이제 와서 이는 무용하다. 그럼에도 그건 늘 우리 어딘가에 묻혀 언젠가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달리 말해 그와 함께 소망했던 미래-세계를 마치 씨앗처럼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건··· 늘 나 자신만의 무엇보다 더 크고, 무겁고, 아름답다. 물론 이를 잊지 않는, 또는 잊을 수가 없는 불능에는 무덤지기의 책임 같은 슬픔이 뒤따른다. 헤어지기 직전 둘의 교차하는 표정. 아마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다. (아니, 사실, 또 모르기는 하지?)
상실 이후 남는—선물 같고 폐허 같은—미래 가능성들, 지금 여기 아닌 ‘다른’ 세계선에 대한 잠재 가능성들은 그래 봤자 기껏 우리 자신에게 슬픔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이해 방식을 자기 교육 하게 할 뿐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따져 보면 인생 또한 그리 대단하지 않긴 마찬가지다. 〈라라랜드〉는 이를 직접 영화 매체의 특성을 통해 시연한다. 말하자면 마지막 10분의 쾌속 ‘주마등’은 그럴 수도 있었던 가능 세계, 그렇지만 당장 현실에선 도달 불가능한 다중 우주의 어느 시간선을 통째 ‘다시’ 잃어 보는 유사 상실 체험을 통해 삶의 필연적인 슬픔을 교육하는, 거의 마법적인 트릭이다. 이는 뻔한, 노골적인 장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대단하지 않고 대단해질 필요조차 못 느낀다는 듯이 구는 무려 ‘재즈’ 뮤지컬 영화를 126분짜리 아포리즘으로 본다. 그래, 그러니까 〈라라랜드〉가 인생(에 관한) 영화라는 말은 이제 틀린 말도 아닌 거다···.
나를 울리는 작품에 대해 쓰려 한 건 아니지만 『룩백』 또한 이와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룩백』의 연인들처럼 이 단편 만화의 연인들—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렇게 쓰고 싶다—인 후지노와 쿄모노 또한 예술, 그중에서도 만화를 향한 같은 열정과 비전으로 깊게 결합된다. 예상 가능하겠지만 어느 시점 둘은 서로에게서 독립한다. 후지노는 만화가로 성공하고 쿄모토는 미술 대학에 입학한다. ‘나쁜’ 일은 누구 하나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서 너무 빨리 일어난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 그를 하필 그때 거기 있게 했던 마음, 그러므로 그를 죽게 한 마음, 그럼에도 분명 둘이 함께하는 미래 세계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바로 그 마음에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만화를 그만 그린다, 더는 만화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쿄모토를 방에서 내보내지 않았다면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어라? 어째서···? 어째서 그렸지···?” 지금 아닌 언젠가엔 누군가와 함께—쿄모토의 관점에서는 또한 ‘동등’하게—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이 결과적으로 다른 누군가를 나쁜 결말로 인도했다는 해석은 아무래도 잔인하다. 그럼에도 우린 그 나쁜 결말 앞에 동결 건조 되어 있는 가능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만 그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쿄모토의 닫힌 방문 틈을 통로 삼아—〈라라랜드〉와 같이—지금 여기 없는 어느 시간선의 ‘주마등’이 상연되고 이제 우린 안다, 모든 다중 우주에서 둘은 만나 만화를 그리면서 함께 살아간다. 마치 끝을 이미 아는데도 첫 페이지를 펼친다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마치 원한다면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는 ‘주마등’과 같이. 이와 같이 영화와 만화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다름 아닌 상실과 관계 맺는 법을.
영화 × 만화
데이미언 셔젤, 〈라라랜드〉(2016)
후지모토 타츠키, 『룩백』, 김시내 옮김(학산문화사, 2022)





